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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서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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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에 대해 알아보자. 철수는 평균적인 인물이다. 32.94살에 결혼했으며, 1.05명의 자녀를 가졌고, gdp를 국민 수로 나눈 만큼 벌었다. 1개월에 1.6권의 책을 읽었다. 연평균 2069시간을 일했기 때문에 더 읽을 시간은 없었다.
암튼 서점에 들른 평균적인 철수는 평균적인 베스트셀러 매대에서 평균적인 책을 샀다. “장미의 이름” 양장본이 베스트셀러 1등이어서 그걸 샀다. 지난달엔 무슨 떡볶이 책을 샀고, 지지난달엔, 철수는 평균맨이지 중간맨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희소한 확률이긴 한데,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샀다.
철수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대중 없었다. 매대에 깔린 책을 고르고, 트위터에서 유명한 누가 추천한 책을 골랐다. 회사 부장이 자꾸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물어봐서 산 책도 있고, 대학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을 사기도 했다.
철수는 책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영화를 고를 때는 평론가의 별점을 보고 고르거나, ‘왓챠’에서 추천한 영화를 고르면 대개 성공이었다. 그러나 책은 ‘왓챠 도서’ 서비스가 열렸지만, 데이터가 부족한지 영 신통치 않았다. 도서 평론가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혹 그 비슷한 사람들이 쓴 뭔가를 본 것도 같긴 한데, 대부분의 영화를 보는 영화평론가와 대부분의 책을 읽지 못하는 도서평론가는 질이 달랐다.
그럼에도 철수는 1개월에 1.6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곳에 사는 40%의 인간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일이었다. 철수가 어떻게 책을 골라서 어떻게 읽는지 감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철수는 평균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철수인 것은 아니었다. 철수의 옆집에 사는 전혀 평균적이지 않은 인물, 즉 정규분포 그래프의 저 끝단에 존재하는 첳숳(이게 이름임)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첳숳는 중위소득의 중간값만큼 버는 중산층 4인가구의 자녀였고, 대학에서 문학 동아리를 했고, 졸업할 때까지 매년 300권의 책을 읽었다. 첳숳가 어떤 책을 읽을지는 비교적 쉽게 상상되었고, 일군의 노동자들에게 ‘타겟 독자’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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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철수는 책을 읽었고, 책은 철수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양을 약간 늘리고, 감성을 키우고, 철수가 사는 공동체를 더 좋게 만들었다. 다른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책도 있고, 읽지 않는 게 나았을 책도 있었다. 혹은 단순히 ‘읽는 순간에 기분이 좋았던’ 것에 불과했던 책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책을 읽은 철수와 읽지 않은 철수(평행세계의 지구-4에 거주함)의 삶은 완전히 같았다.
여기 철수가 평생 읽은 책을 모두 꽂아둔 철수의 서재가 있다. 서재를 찬찬히 살펴보자. 어떤 책이 보이는가? 그 책들의 집합은 어떤 효과를 만들었는가? 독서는 철수의 삶에서 어떤 의미였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대조군이 있어야 되는데, 이승에는 없다. 그러나 저승에는 있다. 정말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철수와 함께 저승으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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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저승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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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귀왕문 앞에 까마득히 많은 철수가 서 있다. 평행세계의 모든 철수가 모인 것이었다. 즉,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철수의 집합이다.
철수들은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며 기억을 나누었다. 서로는 서로의 대조군이었다. 언제 다 하냐 싶겠지만 저승의 시간은 이승의 시간과 달랐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그중 일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철수 중에는 살면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철수도 있었고, 2만 권의 책을 읽은 철수도 있었다. 앞의 철수처럼 1562.08권의 책을 읽은 철수도 여러 명 있었는데, 그들의 삶은 모두 달랐으며, 독서에 대한 평가 또한 서로 달랐다.
철수-3은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의 삶을 살았는데, 문학이라고는 교과서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철수-88은 국문과를 졸업하고 편집자의 삶을 살았는데, 전체 철수 중 순위권에 들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엔지니어 철수는 ‘나도 그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했고, 편집자 철수는 ‘내가 그때 공대를 갔었으면’하고 후회했다.
철수-6687은 겉으로는 존경받는 학자의 삶을 살았고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지만, 일생 동안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에게 총 십사만 육천 시간의 부당한 노동을 시킨 죄를 범해 그것의 만 배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지옥불에 탈 예정이었다.
철수-773은 살아생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가 살던 작은 마을에서 일생 동안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의 장례식 행렬이 산을 넘고 물을 가르며 그를 따라 길고 많은 눈물이 흘렀다고 전해진다.
철수의 이야기는 그만하고, 인생에선 자기자신이 제일 중요하니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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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편집자의 삶을 살았다. 삼백이십오 권의 책을 책임편집하고 막 생을 마쳤다.
당신은 상당히 옳은 삶을 살았다. 저승에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평가받았다. 염라대왕은 당신에게 ‘윤리 1++등급’ 자격을 부여했다. 윤리 1++등급은 굉장히 희귀한 등급이며, 편집자 중에는 삼백 년만이라고 했다. 사실 좀 예상한 결과였다 ㅎ
상이 따랐다. 다시 편집자로 환생할 수 있는 상이었다.
?
이게 왜때문에 상이냐고 성질을 부리려는데,
“자네, 성미가 급하군.”
염라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환생이 아닐세. 저기 철수들이 보일 것이네. 자네는 이곳에서 모든 철수의 기억을 종합할 자격을 얻었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여기서 철수의 삶들을 다 검토하고, 거기서 도출된 결론을 검토서로 써서 허리춤에 끼고 환생할 수 있단 말이네!”
표4카피 뽑는 데 일생을 보낸 당신이 예를 표할 말을 찾은 것은 금세였다.
“생의 내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 온기를 저승에서 비로소 만났습니다.”
당신은 콧노래를 부르며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만 알면 다음 생에 베스트셀러는 모두 내것이다. 출판학교에 안 들어가도 되고, 태생부터 사장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신이 만든 책이 더 좋은 세계를 만들 것이 분명했다. 돈과 명예를 함께 얻을 것이니 잘하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좀 전 죽을 때 주마등처럼 지나간 고난의 시간들이 재차 떠올랐다. 다시 말해, 당신은 저승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작업에는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영원보다만 짧다면 기꺼이 버티리라. 첫 번째 철수의 첫 페이지가 팔락하고 넘어갈 때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길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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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쳤는가?”
“그렇습니다.”
“묻는 것은 법도가 아니다만 궁금하구나.”
“대왕께서 하문하시면 그것이 법이며 도가 아니겠습니까.”
염라가 웃었다.
“정녕 편집자 같구나. 그래, 무엇이라 썼는고?”
“저는...”
(이하의 기록은 消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