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출판 편집자다. 그는 연 300권을 읽는 독서광도 책의 사회적 책임을 깊이 고민하는 범부도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출판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A는 자신의 삶이 강물 같다고 생각했다. 삶이 흘러가다 출판사에 닿았고 또 몇 년을 흘러 일하고 있는 삶이었다. 가끔 자살충동이 들었지만 가끔만큼 병원에서 약을 받아 먹었기 때문에 그 순간들 역시 강물처럼 지나갔다. 매일 우연히 죽지 않은 삶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처럼 매일은 매일을 낳았다. 때가 되면 책과 월급이 나왔다. 계절마저 기계처럼 돌아 겨울은 한파를 잊을 때쯤 왔다. 순환의 주기가 길었다. 문득씩 정신을 차렸을 때는 1년과 3년과 7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제 출판편집자 몇 명이 든 카톡방에는 파주에 건물을 올린 출판사 사장들이 꼴뵈기 싫지만 통일은 되는 것이 좋으니 그린피스가 힘내주어 삼팔선의 고라니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개소리가 울렸다. 초년차 때 카톡방에는 국어문법과 제작발주와 명절 상여금과 관련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고라니에 대한 논의도 정확히 그만큼 진지했다. 그 역시 강물 같았다. 달라진 것은 물가만큼 오른 연봉과 망가진 마음이지만 둘 다 소소한 수준이다. A가 강물이란 단어를 여태껏 버리지 않은 까닭이 그 때문이었다.
10년 뒤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몇살까지만 살고 죽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진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A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랑데뷰든 미색모조든 폐지로 팔 때는 평량만 남는다. ‘연습장이든 고전이든’이라고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출판 짬밥 덕택이었다. 10년 뒤에는 더 기깔나는 일기를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막막한 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