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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룩 KLOOK Aug 11. 2017

제1화, 내게도 여권이 생겼다.

처음이야, 해외여행

 우린, 스스로를 숫자로 설명하는데 꽤 익숙해져 있다. 

 나만해도 그렇다. 

 13자리의 주민등록번호, 33살의 나이, 212번지 4동 1506호라는 주소를 시작으로, 

 180cm의 키에 75kg의 몸무게, 시력1.0 이라는 구체적인 신체의 특징은 물론이고,

 토익점수와 학점이라는 몇 자리의 숫자만으로 나를 치장해본 적도 있다. 

 아! 사회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11자리의 휴대폰번호,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같은 것도 있고.


 또한 숫자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으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일한지 얼마나 됐나요? 연봉이나 자산은 대략 얼마? 집은 몇 평? 

 연애 경험은 몇 명이죠? 가장 오래 사귄 연애의 기간은? 등등등.

 우린, 누군가를 숫자로 평가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걔 중엔 이런 것도 있다.


 “해외여행은 몇 번 다녀오셨어요?”

 나는 이 질문이 가장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지금까진 당당하게 대답을 했었다.

 “0번이요.” 


 당연하다 생각했던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면 사람들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사람들의 입모양이 마치 ‘0’ 의 모양으로 바뀌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들은 “오!” 혹은 “아~” 라는 가벼운 탄식(의미는 모르겠지만)과 함께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 나이에 정말로? 라는 대사가 어디엔가 숨겨져 있을 것 만 같은 그런 시선으로. 




 적어도 지금까진, 굳이 무리해서 해외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나이가 돼 버린 건지, 온갖 여행지의 아름다운 경치와 맛깔스런 음식으로 도배된 SNS의 영향이 큰 탓인지, 별 의미 없이 생각했던 ‘0’이란 숫자는 내 마음에 자기와 똑 닮은 구멍 하나를 뚫어버렸다. 그래서 해외여행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그 구멍을 통해 쌔 한 바람이 때때로 불어오는 것이 아닌가. 쪽팔리게. 


 삶이란 게 그렇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내가 모르는 바다 어딘가에서 파도의 조짐이 일렁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갑작스레 그 파도를 맞닥뜨리고 마는 거다. 내게 있어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그랬다. 

 최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인천공항 출국장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비행기 티켓을 끊을 여유는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요? 돈이 없어서요? 라는 질문은 생략해주길. 여유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은, 그저 여유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그 자체의 여유마저 없는 총체적 난관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런 나를 향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유가 있어야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을 떠나면 여유가 생기는 거라고. 뭐,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아주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일상의 끈을 확! 하고 한 번에 끊어버리는 주체가 본인이 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럴 땐 외압이 개입을 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 다행히 내게, 그런 타인이 나타났다. 몇 주 전 어느 술자리에서 만난 J라는 인물이다.


“정말로 해외를 한 번도 안 나가 봤어요?"
(여기 까진 많이 겪어본 반응)
“네. 신분증 3종 세트 중에, 아직 여권이 없네요.”
“그럼... 여행경비 지원해 줄 테니, 글 한 번 써보지 않겠어요?”
(응? 정말로?)


 J는 여행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고, 33살이 되기까지 여권번호를 안 가지고 있는 내게 호기심이 생긴 듯 했다. 마치 아무런 커팅이 되지 않은 원석이라도 발견한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는 내게 말을 이었다. 요즘은 다들 여행전문가라며, 전문가들이 써낸 각양각색의 서적 및 포스팅 중 숙달되지 않은 여행초보자가 아주 솔직하게 쓰는 고군분투여행기가 하나 쯤 있다면 좋겠다고. ‘그런 글 많지 않아요?’ 라는 리액션은 생략했다. 공짠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욘 없었으니까.


 그날따라 술 빨이 참 잘 받았고,

 그렇게 나는 생에 첫 해외여행으로의 발걸음을 떼게 됐다. 




 다음날.

 경건하게 토마토 주스를 한 컵 먹고선 해외여행준비의 첫 단계를 시작했다. 바로 여권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게 뭐라고, 은근히 긴장이 됐다. 

 서랍을 뒤져 증명사진을 찾았다. 아마도 대학 졸업식쯤 입사준비를 위해 찍었던 사진 같았다. 그런데 불현 듯, 여권용 사진은 조건이 꽤 까다롭다했던 누군가의 조언이 떠올랐다. 


출처 : 외교부 여권안내홈페이지(http://www.passport.go.kr/issue/photo.php)

응? 탈모사진? (*모자를 쓰지 않은 사진을 말한다)


 역시나, 내가 갖고 있는 사진은 자격 미달이었다. 누가보기에도 5년은 더 지난 것 같은 외모에 갈색 아지렁이가 일렁이는 요란한 배경까지. 그래서 왁스로 머리 손질도 하지 않고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로 외출을 하려던 난, 우선 꽃단장을 하고서 사진관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용실을 먼저 가야하는 줄 알았다. 어이없겠지만, 사진 규정의 머리 길이 조항을 순간 잘못 보고선 머리카락의 길이가 3.2~3.6cm여야 하는 줄...)


 출입국심사대에서 퇴짜 맞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수정을 끝낸 따끈따끈한 증명사진과 함께, 인터넷에서 미리 다운받아 작성해 놓은 신청서를 갖고 10분 거리의 구청으로 향했다. 여권은 소재지의 시청, 구청, 군청의 종합민원실을 직접 방문해서 서류접수를 해야 하는데, 주민등록지와 상관없이 전국 어디에 있는 239개 여권사무 대행기관에서라도 접수가 가능하다고 한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해 놓는 건데, 여권을 만들기 위해선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공무원증과 같은 신분증을 반드시 필요하다. 여권 이란 게 신분증이니, 신분증을 만드는데 다른 신분증이 필요하겠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나만 그랬나?)


 여권신청은 금방 끝났다.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단 걸 발견하긴 했다. 우선 유효기간이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18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유효기간 10년짜리 여권이 의무적으로 발급되지만, 그 이하의 나이라면 5년짜리 여권밖에 발급받지 못한다. 여권의 면수에는 24면과 48면리란 선택지가 있다. 해외 출장이 잦은 게 아니라 1년에 2~3번 만 여행을 갈 거라면 24면도 충분하다는 얘길 들었지만,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니 48면을 선택했다. 우리가 흔히 만드는 복수여권 말고, 유효기간 1년 이내의 단수여권이라는 게 있단 것도 처음 알았다. 단수여권이란 건 한 번 쓰고 버리는 여권을 말한다.  


출처 : 외교부 여권안내홈페이지(http://www.passport.go.kr/issue/commission.php)

 신청서와 함께 수수료 결제를 위한 신용카드를 건네며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렇게 들뜰 거면, 왜 진즉 여권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살짝 났다.   

 그리고 1주일 뒤, 드디어 여권을 받았다. 개인정보가 내장된 IC칩이 붙어 있는 전자여권 이었다. 빳빳한 새 여권을 위해 여권 케이스도 하나 샀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수령했을 때의 기분과는 기분이 또 달랐다. 지방 경찰청(정보과 신원반)에서 결격사유 없이 통과 시켜준 것 이니, ‘위 사람은 도덕적으로 살아온바 얼마든지 해외를 들락날락 거려도 됩니다.’라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33년 만에 처음 생긴 여권번호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J였다. 

“첫 여행지가 정해졌네요.”
“네? 어딘가요?”
“싱가폴 어때요. 싱가폴로 하죠.”




notice. 

1. 구여권이 있다면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2. 영문 성명을 잘 표기하는 게 중요하다. 모음 ‘ㅜ’나 ‘ㅓ’와 같은 경우엔 사람들마다 쓰는 로마자가 상이하다. 한번 정하면 원칙적으로 변경이 어려우니, 비치된 로마자 표기법을 참고하도록 하자. 

3. 본인이 여권을 수령할 땐 신분증과 접수증이 필요하다. 위임장이 있다면 대리인이 수령할 수도 있다. 

4. 6개월 이내 사진으로 하자. 실물과 너무 다르면 출국하기 힘들어 질 수도. 




연애만한 여행이 있으리.
연애&여행 칼럼니스트 김정훈
tvN 드라마  <미생>,

OCN <동네의 영웅> 보조작가,
책 <요즘 남자, 요즘 연애>,
<연애전과>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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