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유
"너는 왜 우리 집에 왔니?"?
우리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질문이 필요하기나 한 걸까? 인간에게 그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인들은 서로 묻고는 한다. "너는 내가 왜 좋아?" 당신은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그냥" 이 말이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저서 ‘느림’에서 이렇게 말했다.
“Love is by definition an unmerited gift; being loved without meriting it is the very proof of real love. If a woman tells me: I love you because you're intelligent, because you're decent, because you buy me gifts, because you don't chase women, because you do the dishes, then I'm disappointed; such love seems a rather self-interested business. How much finer it is to hear: I'm crazy about you even though you're neither intelligent nor decent, even though you're a liar, an egotist, a bastard.”
"사랑은 그럴 까닭이 없는 것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것을 값지게 하는 것이 없어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훌륭한 보증이다. 만약 한 여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너를 사랑해 왜냐하면 너는 지적이고 품위 있고 나에게 선물들을 주고 여자를 쫓아다니지 않고 설거지를 해주니까, 그렇다면 나는 실망할 것이다.; 그런 사랑은 다소 사리사욕에 눈이 먼 사업 같다. 이것이 얼마나 더 듣기 좋은가?: 나는 너에게 미쳐있어 네가 지적이거나 품위 있지 않아도 심지어 네가 거짓말쟁이, 이기주의자에다 개새끼일지라도"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까지는 어떠한 이유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을 나에게 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영화이야기를 해보자. 수강이 지민에게 사랑에 빠진 이유도 영화를 본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던 수강이 돌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지민은 손수건을 건네 준, 즉 자신에게 호의를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난 후,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이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그냥"이라는 대답으로 설명되며 그 사람과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마냥 좋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지금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그러한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당신의 제대로 된 사랑은 이미 끝나있었던 것이라고. 사랑은 우리가 약삭빠르게 사고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다. 사랑해 본 사람만이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네카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성적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동물이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깨닫는 것은 바로 고통을 통해서이다.
그 사람이 곁에 있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그 부재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의 원인인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구애를 통해 연인이 되어 곁에 두는 시간을 늘리고, 더 나아가서는 결혼을 통해서 그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지속하고자 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랑의 대상이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용기를 요구한다. 겁쟁이는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용기가 언제나 사랑의 쟁취를 낳지는 못한다. 나의 용기와 노력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더 강하게 닫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한 일에 대해 실존주의 심리학자인 롤로 메이는 이렇게 말 했다.
"It is an ironic habit of human beings to run faster when they have lost their way"
"인간이 그들 자신의 길을 잃었을 때 더 빨리 달린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습성이다."
길을 잃었음에도 더 빨리 달린다면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어디가 될까? 우리는 열심히 달리기만 한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했을 때, 더 빨리 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비극적인 습성이다.
인생을 철저히 계획하고 실행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러한 일은 멍청한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의 등장인물인 병희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자. 불행은 인간의 선택 같은 것을 초월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어떠한 선택이 더 나은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There is no means of testing which decision is better, because there is no basis for comparison. We live everything as it comes, without warning, like an actor going on cold. And what can life be worth if the first rehearsal for life is life itself? That is why life is always like a sketch. No, "sketch" is not quite a word, because a sketch is an outline of something, the groundwork for a picture, whereas the sketch that is our life is a sketch for nothing, an outline with no picture.”
"거기에는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시험할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비교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경고 없이 그것이 오는 대로 산다. 마치 감기에 걸린 배우처럼. 그리고 만약 삶이 그 자체를 위한 첫 번째 예행연습이라면 삶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것이 삶이 언제나 스케치 같은 이유이다. 아니, "스케치"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스케치는 무언가를 위한 개요이고 어떤 그림을 위한 준비 작업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말하려는 우리의 삶인 스케치는 아무것도 위하지 않고 그림 없는 윤곽이다."
쿤데라의 언급처럼 삶은 어떤 경고도 해주지 않고 다가오고 우리는 이것이 오는 대로 살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계속 함께 있어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던 사람에게 우리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사랑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살게 된다. 하지만 큐피드는 나에게만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사랑의 비극은 탄생한다.
사랑은 어른만 할 수 있다. 아이는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민은 수강을 사랑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굉장히 상투적이면서도 인상적인 대사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영화 속 수강은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해 준다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만 기적이 아니야. 그건 정말 기적이야." 맞는 말이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엄청나게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일 정도로 기적은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수십억 인구 중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것은 기적이다.
사실 이 지구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기적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 중에 지구 같은 행성이 생길 확률, 그리고 그 행성에서 태어날 확률, 같은 시대에 태어나 엄청나게 넓은 공간들 속에서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게 될 확률 모두 어떻게 보면 필연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적에 가까울정도로 엄청나게 작은 확률들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들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기적 속에 둘러싸여서 기적을 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