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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드 Oct 05. 2019

한 사람은 어떻게 러너가 되는가?

1.5km달리고 구토하던 내가  42.195km를 뛰기까지

1.5km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나이는 스물다섯, 이제 막 해병대 장교 시험에서 1.5km를 7분의 기록으로 뛰고 왔다. 이 시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장교시험은 보지 않기로 했다. 후회 없는 시험이길 바랬지만 준비가 부족했다. 팔굽혀펴기도 윗몸일으키기도 최악의 성적들만 연속으로 받았다. 달리기라도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전력으로 달렸지만 체력이 도와주지 않았다. 7분,  결국 모든 체력시험에서 하위권을 기록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 옆에 난 풀들에 한참을 토악질을 했다. 무리한 달리기의 여파였다.


 3개월 후에 남자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장교시험에서 탈락통보를 받았다. 벌써 해는 지나 이제 스물여섯, 3월 이제 육군 병사로 입대하기에도 늦은 시간이었다. 


당연히도 나의 이야기다.


   찾고 찾아 모집병제인 공군으로 5월에 입대하는 것이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군병은 체력시험이 없었다. 지원하고 합격통지를 받고 입대 날을 기다리면서, 무엇을 준비 할지 고민했다. 달리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윗몸일으키기도 팔 굽혀 펴기도 힘들었지만, 달리기가 내게 준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떤 거리라도, 자신의 체력을 넘어서는 달리기를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기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운동이다. 


  내가 처음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입대하면 계속 달릴 일이 생길 텐데, 꾸준히 달려서 체력을 늘리면,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나가서 뛰기 시작했다. 집 근처 공원에 트랙이 있어 조건도 좋았다.


  나갈 생각을 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막상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공원으로 길을 나설 때,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오늘은 3킬로 미터 정도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가벼운 마음은 첫 바퀴인 600m를 달리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한다. 시작 전의 상상과 달리 내 몸은 그렇게 가볍지 않고, 내 폐활량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나는 힘들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힘들면 그래도 거리는 채우니까 라고 위로하며 걸었다. 어떤 날은 1.5km를 뛰었고, 어떤 날은 걷고 뛰면서 3km를 겨우 넘겼다. 남들이 볼 때는 형편없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일주일에 한 두 번이라도 달리면서 입대 날이 다가왔다.


3km


  누구에게나 훈련소는 힘들고, 특히 자신이 겪은 훈련소는 가장 힘들다. 지금 돌아보면 모든 과정을 하하하 웃으며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처음 겪을 때 그런게 될 리가 있나. 훈련소의 하루는 걷고 뒹굴고, 걷고 뛰고, 걷고 뒹구는 날의 연속이었다. 거의 매일 뛰었다. 매일 아침 구보를 뛰었고 가끔은 체력검정을 위해, 가끔은 훈련의 일환으로 뛰었다. 군장을 하고 총을 들고뛸 때도 있었고, 유격대를 외치면서 뛸 때도 있었다. 몸살 기운이 있을 때 달렸던 마지막 전투 뜀걸음을 제외하고 훈련소에서의 달리기는 모두 할 만했다. 3km 기록으로 등급을 나누는 체력검정도 죽어라 뛰니 특급은 힘들어도  1급은 받을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열심히 달려 놓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성장했다는 느낌이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훈련소 기간이 끝난 후에도 군인은 매일 달린다.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점호를 하고 주말을 제외한 매일 뜀걸음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달리는 행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솔직히 나는 나쁘지 않았다. 매일 같은 길을 달리며 마시는 깨끗한 새벽 공기(물론 보통은 미세먼지로 가득했지만)가 폐를 가득 채우는 그 느낌이 주는 즐거움을 점점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꾸준히 달리며 2년이 지나갔다.


10km


  전역을 했다. 내 조건은 2년 전 그대로였다. 아니 사실 갖고 있던 것들 조차 지키지 못했다. 이십 대 초반의 몇 년은 철학에 심취해, 전공인 신소재공학은 뒤로하고, 거의 매일 철학 강의를 듣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겨우 철학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연애에 심취해 거기에 모든 걸 바쳤다.(돌아보면 착각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20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었던 것들은 세월이 지나가면서 하나씩 떠나갔다. 먼저 열심히 외웠던 철학자의 이름들과 연도들과 개념들이 잊혀가기 시작했고,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나에게 가르쳐 줬던 사람은, 진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나에게 애써 알려주며 떠나갔다.


  군대에서 들였던 좋은 생활습관도 계급이 주는 편안함과 함께 사라져 가려고 할 때, 내게 남은 것은 달리기 하나뿐이었다. 매일 무의미한 짓을 하며 밤을 새우고 오후에야 겨우 일어나, 내 삶의 가치에 대한 의문이 가득 해지는 밤이면, 나는 스물다섯에 처음 달리기 시작했던 공원으로 나갔다. 달리는 순간만큼은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트랙을 달리는 이 하루 한 시간이, 내 일상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폐를 가득 채우는 공기와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지면의 저항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다. 내 마음은 너무나 연약해서, 누군가의 인정없이 나 스스로에게 나의 가치와 존재를 납득시키는 것이 힘들었다. 

머리로 하는 일만 내내 해왔던 나에게, 오히려 육체적인 활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나는 달리기는 알려주었다.


21.1km


  운이 좋게 직장을 구했다. 목표가 생겼다.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달리기 이외의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삶의 모든 방향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모든 결과가 달리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변화 이전에 그리고 이후에 내가 꾸준하게 해 온 행위라곤 달리기 뿐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변화에서 달리기도 빠지지 않았다. 10킬로 내외를 달리던 수준에서 15킬로미터로 20킬로 미터로 거리는 계속 늘어만 갔다.


  장거리 달리기는 잠을 자는 행위와 유사하다.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하루 동안의 기억들을 정리하고 재배열한다. 장거리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생각의 범위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로 확장되었을 뿐이다. 


   처음엔 최근의 고민거리나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거기서 뻗어 나온 생각들이 계속해서 과거로 뻗어나간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몇 분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고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기도 한다. 어떤 때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그냥 기분만 느껴질 때도 있다. 즐거운 기분이 찾아오기도 하고 약간의 우울함이나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경험을 하며 달리기를 마친 후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것들이 한 번에 확 씻겨나간 듯 개운해진다. 삶에서 비롯되는 여러 잔여물들이 씻겨져 내려가고, 이제 그 공간을 새로운 것들로 채울 준비가 된 기분이 찾아오는 것이다.


42.195km


 혼자만의 싸움이면서, 모두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주할 수 없었을 길.


  풀 마라톤이 기존의 달리기와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라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쉽게 할 수 있는 행위는 못된다는 것이다. 코스를 마련하고 교통을 통제해주는 사람들 구간 구간마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내 몸이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30킬로미터 이후의 구간에서 온 몸이 아프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길이 모두와 함께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두의 도움 덕분에, 1.5킬로미터를 뛰고 토를 하던 나는 42.195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 러너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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