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 전시회 in 국립한글박물관
고려 말 정몽주의 시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와 태종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이 시조들이 어떻게 모두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지던 가곡의 노랫말 580수를 한데 모아 시대별, 인물 별로 엮은 책 '청구영언'(靑丘永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청구영언 원본이 70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국립 한글 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 옛 노래들이 뜨겁게 살아 숨 쉬는 현장을 찾았습니다.
조선 영조 시대의 가인(歌人)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靑丘永言)’은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가곡 노랫말 책입니다. ‘청구’는 ‘우리나라’, ‘영언’은 ‘노래’라는 뜻입니다. 가곡은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이 즐긴 성악곡의 한 종류인데요. 청구영언에는 고려 말부터 1728년 편찬 당시까지 임금, 사대부, 기녀, 중인, 무명씨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가곡의 노랫말들이 한글로 실려 있습니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에 지은이가 명확한 작품 외에도 일상적이고 저속한 내용이 담긴 작품 116수를 ‘만횡청류(蔓橫淸類)’라는 제목 아래 묶어 실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특히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했던 만횡청류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전시는 일반인들이 옛 한글 노랫말을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크게 2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옛 노랫말의 현대어 풀이를 중심으로 2부는 수집된 각종 유물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청구영언 원본을 비롯한 가곡 관련 유물 총 61점이 선보입니다.
1부는 현대적인 도심 공간을 배경으로 옛 노랫말의 독특한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풀어냈습니다. 한양의 풍류와 일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노랫말,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노랫말, 노래를 짓고 부르던 풍류방 속 주인공인 '여항인'(閭巷人)의 노랫말을 영상과 공간 연출을 통해 소개합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이된 옛 노랫말들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는데요. 노랫말의 맛과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쓴 글씨들이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랑의 노래들 중에 애욕과 치정 등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노랫말들은 홍등가처럼 은밀하게(?) 연출한 공간에 따로 전시되었습니다. 이른바 '19금 공간' 속 옛사랑의 노랫말들은 오늘날의 정서로 보아도 무척이나 솔직해서 놀라웠는데요. 이곳에 전시된 파격적인 노랫말 17수는 이진경 작가가 손글씨와 그림을 맡아 전시했습니다.
2부 '세상 노래를 모으고 전하니'는 청구영언 원본과 함께 편찬 배경과 과정, 책의 구성과 노랫말 등을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의 다양한 가집들과 연행 시 사용했던 악기와 악보, 교과서 등에 실린 청구영언 노랫말의 변화상, 현대로 이어지는 가곡창과 시조창의 차이점 등이 순차별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대표 3대 가집이 한 자리에 모이는 첫 전시회인데요. 조선 후기는 가곡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사대부 음악인 가곡이 중인 계층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된 것인데요. 가창에 쓸 가집 편찬이 활발해지고 전문 가객이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천택의 '청구영언'과 더불어 김수장(1690-?)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755년), 박효관(생몰년 미상)·안민영(1863-1907)의 '가곡원류'(歌曲源流)(1876년)가 제작되었습니다.
전시에 선보이는 '가곡원류'는 박효관과 안민영이 필사한 원본이며, ‘해동가요 박씨본’은 현재 전하는 해동가요계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3대 가집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가집들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시품 중에는 성호 이익의 셋째 형인 옥동 이서가 연주했던 거문고인 ‘옥동금’(국가 민속문화재 제283호), 조선 후기의 거문고 악보인 ‘어은보’(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4호)와 ‘삼죽금보(국립국악원 소장)’ 등 노랫말의 가창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고(崔古)의 한글 시조집 청구영언
이번 전시는 청구영언 원본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이자 처음 시도되는 가곡 노랫말 전시입니다. 청구영언의 원본은 학계에서도 몇몇 연구자를 제외하고 공개된 적이 없었습니다. 최근 열린 언론간담회에서 김희수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청구영언 원본은 상설전시실에서 잠시 공개된 적은 있지만, 특별전 형태로 나오는 것은 최초”라며 “국립 한글박물관이 입수하기 전까지 인사동 고서점에 있던 청구영언 원본을 실제로 본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연구와 조사를 거쳐 청구영언의 영인본과 주해서를 발간하고 이번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노랫말은 악보가 있어야 노래로 실현됩니다. 청구영언에는 노랫말은 있지만 구체적인 음악 정보가 없기 때문에 실제 노래와 연주는 당대의 악보를 참고해야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노래가 되어
청구영언의 노랫말은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과 생각,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김천택은 노랫말을 실을 때 작가나 노랫말에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과 일화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 건국을 앞두고 이방원과 정몽주가 읊었다는 '하여가'와 '단심가'는 청구영언에서 최초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외에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 외세의 침입에서 나라를 지킨 무인의 노랫말 등이 있습니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의 우정 이야기, 황진이와 서경덕의 남녀를 초월한 예술 세계 등 유명한 일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구영언에 실린 노랫말 중에는 문학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많고, 현재까지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맹사성, 이황, 정철, 김천택 등의 노랫말이 대표적으로 실려 있습니다.
옛 노랫말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일상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점들에 특별히 주목하여 기존의 전시 연출과는 다른 작업을 시도했는데요. 옛 노래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음악과 영상으로 구현한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청구영언의 420번 노랫말인 ‘푸른 산도 절로절로’는 영화 ‘부산행’ 등의 음악을 담당한 장영규 작가가 작곡을 맡았고, 여창 가객 박민희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시회 후반부에는 미디어 테이블을 설치하여 청구영언 노랫말 580수 전체를 주제별, 작가별로 검색하고 읽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청구영언 편찬을 위한 김천택의 노력은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노랫말의 틀린 내용을 바로잡고 문맥에 맞게 글을 더하거나 빼기도 했습니다. 한두 개씩 구전된 노랫말은 온전한 작품을 구하여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이렇게 수집한 노랫말을 가창(歌唱)에 도움이 되도록 악곡 별로 정리하였습니다. 청구영언 이후 발간된 가집들은 청구영언에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시대의 특징을 담아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옛 노래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뜨겁고 더러는 서럽고 비장해서 쉬이 잊히지 않는 노랫말이었습니다. 옛 한글의 정취를 살리면서 원문을 현대 말로 풀이한 작업은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 기획 특별전은 오는 9월 3일까지 전시됩니다. 전시 해설은 매일 1회 오후 2시에 진행됩니다. 7월 21일에는 전시 연계 특별 강연 '능청능청 부르는 일상의 노래, 만횡청류의 세계'가 진행됩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연중무휴이며 이용 시간은 평일 오후 6시까지, 토요일 9시까지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9시까지 연장되어 좀 더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옛 한글 노래들의 생생하고 아름다운 숨결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