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앙리 라띠그 사진전 in KT&G 상상마당
영원히 붙들고 싶은 일상 속 순간이 있습니다. 행복한, 더없이 즐거운 순간들.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다시 떠나가버리기에 행복할수록 안타까움도 커집니다.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마음속에는 짧은 순간을 영원히 지속시키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습니다.
일상 속의 잊지 못할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추억하는 일은 이제 누구나 향유하는 취미가 되었는데요. 카메라가 아직 귀했던 시절, 20세기 초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절을 담아낸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라 벨 프랑스(La belle france)!, 자끄 앙리 라띠그 사진전'입니다.
자끄 앙리 라띠그 전시회는 KT&G 상상마당 20세기 거장 시리즈 중의 하나로 2014년 로베르 두아노, 2015년 레이먼 사비냑, 2016년 장 자끄 상뻬를 이은 네 번째 전시회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프랑스 자끄 앙리 라띠그 재단과 알랭 귀타르 갤러리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는데요, 전시 제목인 '라 벨 프랑스(La Belle France)'는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프랑스'라는 뜻입니다.
전시회의 구성이 여타의 전시회와 사뭇 달랐는데요. 작가의 연대기 순으로 구성하는 대신, 작품을 주제에 따라 분류해서 <시간의 흐름, 현대적인 안목, 사진에서의 속도, 가벼움, 아름다운 여인들, 라띠그의 피카소, 미지에 대한 탐구, 오토크롬, 빈티지 컬렉션>와 같은 순서로 구성했습니다.
자끄 앙리 라띠그(Jacques Henri Lartigue)는 1894년 프랑스 쿠르브부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스포츠와 야외활동을 즐겼던 가족들 덕분에 활발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요. 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카메라를 선물 받은 라띠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행복한 기억들을 간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촬영한 20만 장에 달하는 사진은 취미 사진가였던 그의 사적인 컬렉션이자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즉 좋은 시절이라 불리던 20세기 초 프랑스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은 주로 그의 10대에서 30대 시절의 사진들로, 연도로 따지면 1900년대부터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시간의 흐름, 현대적인 안목, 사진에서의 속도, 가벼움
어린 라띠그는 자신의 장난감 경주용 차를 바닥에 늘어놓고 낮은 자세로 촬영함으로써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대상에 따라 다양한 구도를 직감적으로 탐구하면서 현실 속의 모호함을 표현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의 상류층들은 자동차 경주 대회를 통해 속도감을 즐겼습니다. 라띠그의 가족도 아버지가 직접 만든 봅슬레이로 경주를 하곤 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가족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조르주 부라르가 추월당하는 순간을 생동감 있게 포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진 속 주인공 르네 페롤은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질 무렵 라띠그가 첫눈에 반했던 루마니아 출신의 모델입니다. 작은 입과 큰 눈을 가진 큰 키의 늘씬하고 아름다운 르네를 처음 본 순간, 라띠그는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후 2년간 그녀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록하게 됩니다. 창문 너머에서 수줍은 듯 서 있는 르네를 촬영한 이 사진은 어두운 방 안과 밝은 테라스의 대비를 통해 그녀의 매력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혼란스러운 라띠그의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신약 개발의 공을 세운 의사이자 저명한 학자였던 부카르 박사와 ‘비비’라는 애칭으로 불린 라띠그의 첫 번째 부인, 마들렌이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다정한 둘의 모습에서 라띠그 부부와 부카르 박사가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띠그는 카메라를 향해 새침하게 뒤돌아보는 비비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습니다.
수잔 렝글렌은 윔블던 대회에서 여섯 번이나 우승한, 당대 하드코트 여자 테니스 선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패셔너블한 신여성의 전형이기도 했습니다. 여성 스포츠웨어에 혁신을 가져온 디자이너 장 파투가 그녀를 위해 디자인한 플리츠 스커트와 슬리브리스 가디건, 오렌지색 헤어 밴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재까지도 패션계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라띠그는 그녀를 포함한 여러 운동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했습니다.
1963년 <라이프>지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라띠그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스쿠터를 타고 코너를 돌다 넘어진 순간, 사촌 시몬 러셀은 라띠그가 자신이 넘어질 것을 예상하고 셔터를 누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라띠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력의 부재'와 '가벼움'은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아름다운 여인들, 라띠그의 피카소, 미지에 대한 탐구, 오토크롬, 빈티지 컬렉션
청소년기의 라띠그는 패션과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그는 여인들의 화려한 드레스뿐만 아니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림자에도 집중했습니다. 당대 프랑스 상류층 여인들이 자주 드나든 블로뉴 숲길에서 촬영한 사진은 훗날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미술 담당이었던 세실 비튼의 의상 제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직업 화가로 활동했던 라띠그는 당시 유명했던 인사들이나 작가들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중 단연 파블로 피카소의 사진들이 주목받았습니다. 피카소 자신도 사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본인의 작업에 대한 연구와 아카이빙을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라띠그 외에 여러 사진가들과 협업하여 자신의 일상과 작품을 다수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라끄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그의 형 모리스, 일명 지수 또한 여러 발명품을 만든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띠그 가족은 이상하게 생겼지만 제 기능을 하는 여러 종류의 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진 속 형이 타고 있는 튜브 모양의 배도 직접 제작한 것입니다. 양복을 입고 물안경을 쓴 채 물 위에 편안하게 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그림자는 라띠그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말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시간의 흐름 같은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이지요. 라띠그는 그림자만이 이 땅에 일시적으로 왔다 가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그림자는 삶보다 더 실체적으로 다가옵니다.
1902년부터 라띠그는 커다란 앨범에 자신의 사진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찍거나 수집한 사진들로 채운 앨범 작업은 말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총 130권, 14,423쪽에 달하는 앨범 작업과 다수의 일기는 그가 남기고자 했던 삶의 발자취이자 기억을 붙잡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라띠그는 처음으로 컬러 필름을 접하게 됩니다. 오토크롬은 적색, 녹색, 청색으로 염색된 미세한 녹말가루를 밑층에 뿌리고 갑광 유제를 상층에 도포한 유리원판을 사용하여, 회화의 점묘화 같은 효과를 내는 천연 사진술이었습니다. 1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아련한 느낌의 색감과 기법이 매력적입니다. 라띠그는 초창기 컬러 사진 기법으로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비비의 사진들을 다수 남겼습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유일한 이유는 그 순간 행복하기 때문이다
- 자끄 앙리 라띠그
라띠그는 사진 애호가였던 아버지를 통해 처음 카메라를 손에 넣은 이후 1928년까지 약 5천 개 이상의 네거티브 유리원판을 제작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자끄 앙리 라띠그 재단에서 직접 공수해온 스테레오 스코픽 장치들을 통해 당시 제작된 유리원판의 이미지들을 직접 관람할 수 있습니다.
* 스테레오 스코픽이란?
두 개를 뜻하는 Stereo와 본다는 뜻인 scopic을 더한 말로 양쪽 눈의 시각 차이를 이용하여 양안 시차가 있는 한 쌍의 2D 영상을 시청자의 양쪽 눈에 각각 제시하여 3차원적인 입체감(깊이감)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
어릴 때부터 놀라운 감각과 집중력을 타고난 자끄 앙리 라띠그는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빈틈이 많아서 언제나 사라질 위협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진은 결국 사라지게 될 행복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것의 소멸을 암시합니다. 라띠그의 천재성은 그가 찍는 것이 기억도, 행복한 순간도 아닌 그것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라 벨 프랑스(La belle france)!, 자끄 앙리 라띠그 사진전'은 오는 8월 15일 까지 KT&G 상상마당 4-5층에서 전시됩니다. 3층 갤러리 라운지에는 ‘사진가’ 라띠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1963년 당시의 '라이프' 주간지도 전시되어 있으니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관람료는 성인 1200원. GuideOn 모바일 앱을 통해 무료로 주요 전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유를 '그 순간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자끄 앙리 라띠그. 장미빛 컬러를 상상하게 만드는 흑백 사진들을 보며 삶을 대하는 낙천적인 자세를 생각해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이번 사진 전시회, 놓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