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마술사, 에셔 전시회 in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영화 '인셉션'을 보면 아무리 올라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눈속임에 불과한 것임이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드러나는데요. 3차원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 무한한 계단은 네덜란드의 판화가 모리츠 에셔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에셔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는 수학, 건축 같은 전문 분야 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소설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인지도와 크나큰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에셔의 작품 세계가 국내에서 단독으로 대중에게 소개된 적은 없었는데요. 에셔의, 에셔에 의한, 에셔를 위한 특별전이 (드디어) 국내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지난 17일 개막한 '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전'을 보기 위해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나는 납작한 형태에 질렸다. 모든 요소를 평면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는 철저히 수학적으로 계산된 세밀한 선을 사용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해낸 작가로 유명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수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대칭과 균형, 3차원 환영의 파괴, 이율배반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작품 130여 점이 선보입니다. 출품작 대부분은 네덜란드 에셔 재단의 소장품입니다.
전시회는 △시간과 공간 △풍경과 정물 △대칭과 균형 △그래픽 총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중 시간과 공간, 풍경과 정물 섹션은 전시 1층에, 대칭과 균형, 그래픽은 지하 1층에 각각 마련되었습니다.
시간과 공간, 풍경과 정물
지상 1층 전시실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다룬 작품을 비롯해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1898년 네덜란드에서 토목 기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에셔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1919년에 하를렘(Haarlem) 건축 장식 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잠시 배웠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담당 교수의 권유로 그래픽 아트에 전념하게 됩니다. 에셔의 초기작은 대부분 풍경화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자연 풍경을 실재 불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해서 그리곤 했습니다. 에셔는 대부분의 작품을 석판화와 목판화로 작업했는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기술적 측면에서 걸작으로 여겨지는 그의 몇 안 되는 메조틴트 작품도 선보입니다. 무엇보다 1층 전시실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습니다.
착각
그림 속 집들의 공간적 특성은 허구입니다. 극단적으로 돌출되어 있는 집이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결국 2차원인 종이로 그려진 그림일 뿐입니다. 가운데 집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결국 우리의 환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거울에 비춘 상
거울이나 물방울, 유리구슬에 비친 반사되는 그림은 에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반사되는 유리구슬 형태의 공이 에셔의 손에 들려있습니다. 그 작은 구슬 속에 비친 방은 왜곡된 형태로 하나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구슬에 반사된 세상은 직접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완전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구슬 속 남자의 머리, 더 정확하게는 그의 눈과 눈 사이의 지점은 완전히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가 구슬을 어떤 위치로 돌리든지 그는 중앙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야말로 그의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불가능한 형태
그림 속 네 개의 공간은 각기 다른 공간인 듯 하지만, 사실은 각각의 중력 구조로 연결된 세 공간들이 가운데의 다른 한 공간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선 우리가 보통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성>은 미국의 만화 '심슨'에 등장했던 바 있으면 영화 '미로', '툼레이더' 등의 배경 장면으로 차용된 적이 있습니다. 인셉션의 포스터와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에셔의 작품 중 대중문화에 가장 많이 차용되는 대표작입니다.
펜로즈의 삼각형
(Penrose triangle)
*펜로즈의 삼각형이란?
펜로즈의 삼각형이란 막대 세 개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도형으로 3차원의 공간에서 불가능하지만 2차원의 평면에 가능한 것처럼 그려 놓은 도형입니다. 1958년 영국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R.Penrose)의 삼각 막대기는 삼각형의 각 부분에서는 오류를 발견할 수 없으나 실제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에셔가 펜로즈 삼각형의 원리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시지각과 착각, 진실에 대한 생각입니다.
펜로즈 삼각형은 세 내각이 60° 를 이루고 있는 평면도형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90°로 만나는 입체도형을 그린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원근법에 따른 착시 효과 때문입니다.
<폭포>는 펜로즈의 삼각형을 차용한 작품입니다. 마치 중력을 거스른 듯 돌고 도는 폭포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직 2차원의 평면에서만 가능한 형태입니다. 유명 모바일 게임 모뉴먼트 밸리에서는 이 폭포 그림을 오마주한 스테이지가 등장합니다.
이 그림의 모티브는 펜로즈 삼각형의 파생형인 끝나지 않는 계단, 이른바 펜로즈 계단입니다. 무한히 오르고 또 오르거나, 내려가고 또 내려갈 수밖에 없는 계단인데요. 이 또한 3차원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형태입니다. 중세의 수도원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사각형의 안뜰은 빌딩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곳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종교를 믿는 수도사들처럼 보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계단을 오르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할 때 뒤를 돌아, 올라가는 대신 내려가는 듯 보입니다. 아래쪽의 두 수도사는 계단 의식 참여를 거부하려는 듯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패러독스적인 신심에 빠져 어리석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들이 이 어리석은 행위를 끝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는 반복과 순환을 상징하는 에셔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소재입니다. 뫼비우스의 띠는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입니다.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한번 꼬아 붙이면 한쪽 면만 가진 곡면이 됩니다. 그래서 고리의 한 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원점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 속엔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도는 개미 아홉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개미들은 계속 기어가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끝없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적 순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손이 어떤 손을 그리는 걸까요? 평면의 스케치가 입체가 되어 손을 그리고 있고, 그렇게 그려진 손은 다시 평면으로 돌아갑니다. 시작과 끝, 허구와 실재,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수한 궁금증을 품게 합니다. 에셔는 이처럼 얽히고 설키는 순환 구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하 1층 전시실에서는 에셔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에셔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여러 대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에셔는 1963년 스페인 남부에 알함브라 궁전을 두 번째로 방문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는 궁전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반복되는 형상들이 규칙적으로 분할되는 장식미술에 크게 감동을 받았는데요. 그 후 에셔는 기하학적 형태의 작업으로 자신의 내면의 환상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의 공간분할에 관심을 가지고 테셀레이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에셔는 그래픽 아티스트의 선구자로 불리는데요. 에셔 본인 스스로는 예술가나 판화가라기보다는 ‘마음과 영혼이 있는 그래픽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픽 아트에서 그는 수학적 도형, 형태, 공간의 관계를 묘사했습니다.
여러 세계
이 그림에는 세 개의 세상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뭇잎이 떠있는 수면, 나무가 서 있는 물 바깥, 물고기가 헤엄치는 물 속입니다. 에셔는 이 세 가지 요소를 한 화면 안에 동시에 그려냄으로써 세 개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테셀레이션
(Tessellation)
*테셀레이션이란?
테셀레이션은 동일한 모양을 이용해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이나 겹쳐지는 부분 없이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테셀레이션은 4를 뜻하는 그리스어 '테세레스'에서 유래된 용어로, 정사각형을 붙여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화입니다. 그림 속에서 검은 바다에 있는 것은 물고기인데요,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로 변형되는 모습입니다. 물고기는 곧 새가 되고 바다는 하늘이 됩니다. 에셔는 이 작품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율배반
에셔의 무한원형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천사와 악마의 형상들을 4중 및 3중 회전축에 의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한없이 축소 복제하며 무한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영감을 얻은 반복적인 패턴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천사와 악마가 만드는 무한한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에셔는 테셀레이션이라는 대칭적 기법을 통해 선과 악처럼 모순되는 관계가 함께 공존하는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가상과 현실을 넒나듬
그림 속에서 도마뱀이 기어나와 3차원의 실제 도마뱀으로 바뀌어 책 위를 기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시 그림책 안의 2차원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도마뱀이 탄생되는 그림은 도마뱀 모양으로 채워진 테셀레이션입니다. 에셔는 2차원의 평면과 3차원의 공간의 대립을 지워버림으로써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벽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마치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꿈을 구현해 내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작품 역시 여러 세계를 넘나드는 주제가 나타나있는 작품입니다. 검고 흰 인간들이 제례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원을 돌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인데요. 이들은 테셀레이션 기법으로 만들어진 뒷 배경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인간 군상들은 무無에서 태어나 평면으로, 다시 공간 속으로 넘나들며 서로를 마주합니다.
무한성에의 접근
직물로 짜인 원형의 띠 위에 기마병들이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되는 직물의 아래, 위 색이 서로 다른 것은 아래쪽 흐린 색깔의 기마병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기마병과 거울에 비친 기마병, 두 차원의 기마병들은 중간에서 서로 얽히면서 합쳐지고 그렇게 어우러진 두 세계의 기마병들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에셔가 추구하는 무한 반복의 표현이 이 작품에서도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래픽
이 작품은 에셔와 에셔 부인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나선형으로 꼬아진 두 개의 선이 왼쪽으로는 여성의 머리를, 오른쪽으로는 남성의 머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을 통해 서로 얽히면서 둘이지만 하나의 개체가 됩니다. 에셔는 나선형 띠를 소재로 인간관계의 따뜻한 유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둥둥 떠다니는 공들로 인해 시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효과 역시 인상적입니다.
에셔의 작품은 20세기 이후 가장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평단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구조에 기초한 그의 환상적인 세계는 예술가보다 수학자와 과학자에게 더 큰 관심을 받았는데요. 에셔의 예술은 오늘날 수많은 현대 화가들과 디지털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테셀레이션 작품의 이미지는 현대 건축과 공간 인테리어에 널리 차용되고 있습니다.
에셔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서 ‘경계와 대립’이라는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럼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진짜과 가짜, 2차원과 3차원 등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대립을 무너뜨립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단순한 유희를 뛰어넘어 철학적이면서 종교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요.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무한한 우주, 삶과 죽음의 영원한 반복, 차원을 넒나듬, 숙명과 같은 메세지들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에게 향해 있습니다. 이번 에셔 특별전은 나, 당신, 그리고 우리와 세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뜻깊은 전시회였습니다.
'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전'은 오는 10월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전시됩니다. 성인 13000원.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오후 6시 이후 입장시 50% 할인된 가격으로 관람 할 수 있습니다. 전시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부터 오후 8시까지 입니다. 보다 즐거운 관람을 위해 공식 도슨트 설명을 들으시거나,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작품들 옆에 따로 설명글이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ㅜㅜ) 새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전시회,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에셔 특별전으로 몸도 마음도 재충전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