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in 서울서예박물관
중국 근현대미술을 이야기할 때마다 빠짐없이 회자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골 목수에서 출발하여 시인이자 전각가, 서가, 화가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치바이스(齊白石). 2011년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ㆍ전서사언련'이 중국 현대회화 작품 중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이슈가 되었는데요. 이듬해엔 피카소를 제치고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낙찰 총액이 가장 큰 작가가 되었습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작가,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등등 여러 별칭을 갖고 있는 치바이스의 개인전이 지난 7월 말 국내에서 열렸습니다. '한중수교 25주년 기념 특별전, 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한중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예술의 전당, 중국호남성문화청, 주한 중국대사관, 중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합니다. '새우', '병아리와 풀벌레', '물소', '포도와 청설모', '수양버들' 등 호남성박물관 소장 치바이스 그림과 서예 전각 55점, 국내 소장 작품 3점, 치바이스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생애 유물 83점 등 총 141점이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데요. 한,중 현대작가들의 치바이스 오마주 작품 43점도 함께 선보입니다.
치바이스(Qi Baishi 齊白石, 1864 ~ 1957)는 ‘중국의 피카소’라 불릴 만큼 20세기 동아시아 미술의 거장으로 꼽힙니다. 그의 본명은 춘즈(純之)이고, 바이스(白石)는 호입니다. 농민화가로 시작해 중국 인민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이력에서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요. 치바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시달리며 정규 교육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습니다. 치바이스 자신도 77세에 이르러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생계를 위해 목공일을 하다가 목장, 조장, 화공을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치바이스는 시와 글씨, 그림을 독학과 사교육을 통해 체득했습니다. 강인한 의지를 바탕으로 왕성한 예술 활동을 하며 시와 그림, 전각으로 생애를 다 보냈습니다. 세상을 뜨기 3개월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수만 점에 이릅니다.
'한중수교 25주년 기념 특별전, 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전시회는 크게 2부로 나누어 구성되었는데요. 1부는 치바이스의 작품과 생애 유물을, 2부는 한중 현대 서화 미술작가가 치바이스를 오마주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1부에서는 치바이스의 면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작품과 유물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후난성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목공 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초기, 중국 전역을 다섯 번 여행하며 사물의 의미에 집중한 중기, 베이징에 기거하며 그림과 전각으로 명성을 얻던 후기까지 치바이스의 작품들을 다섯 개의 섹션 별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치바이스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를 해석하여 독창적으로 그린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회화는 '치바이스 컬러'라고 할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대비, 장검을 휘두르듯 단숨에 죽죽 그어 내리는 직필(直筆)과 디테일한 묘사, 허허실실(虛虛實實)한 공간 경영으로 요약됩니다. 허허실실한 공간 경영이란 말 그대로 시원하게 비워놓기도 하고 빽빽하게 채워 긴장감을 강조하는 것인데요. 치바이스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세밀하게 표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대상의 본질을 극대화해 재현했습니다.
"쉼 없이 호수 건너고 바다를 건너/ 원하던 걸 이루며 맘껏 돌아다녔네/ 고향부터 만리 길 걸을 때까지/ 고난을 함께한 것은 배 한 척뿐이라네."
치바이스는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천사오판, 후친위안과 같은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지도를 받기 시작했는데요. 40대에 접어들어서 치바이스는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기 위해 1902년부터 1916년 사이에 베이징, 상하이, 친저우, 광저우, 베트남, 광둥 등 전국의 경승지를 다섯 번에 걸쳐 여행했습니다. 다섯 번 세상으로 나아가 다섯 번 돌아왔다는 '오출오귀(五出五歸)'의 경험은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치바이스가 자연과 일상생활, 동식물의 생태를 탐구하고 작품의 소재로 삼는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놔두고
신기한 것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사진작괴(捨眞作怪)다
-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에서
치바이스는 새우며 개구리, 개, 쥐, 닭, 벌레, 채소 같은 사람 냄새나는 것을 즐겨 그렸습니다. 특히 그가 그린 생물은 가난한 농가에서 나고자란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던 것들인데요. 치바이스는 언제나 "말을 하려면 남들이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하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그려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친근함을 전해줍니다. 치바이스의 예술 속에는 친근함 이외에도 평화로움과 천진난만함이 공존합니다.
중국 작가 리커란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치바이스 선생은 그림을 그리실 때 실제 사물도 안 보시고 그림 초본이나 초고도 없이 그리신다. 푸른 하늘 아래 흰 종이를 펼쳐놓고 자유자재로 그리신다. 그러나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과 새, 물고기와 벌레, 산과 물, 그리고 나무들이 마치 그의 손 밑에서 자라난 것처럼 생생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선생은 진정 '가슴에 삼라만상을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흙을 사랑하고,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였다.
-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에서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새우' 작품입니다. 밑그림 없이 먹의 농담과 붓선만으로 투명한 새우를 생생하게 묘사한 빼어난 작품인데요. 먹색은 일필(一筆)로 그려낸 것으로, 길게 뻗어나간 새우의 수염, 가냘픈 앞다리와 짤막한 뒷다리, 툭 튀어나온 두 눈이 제각각 다른 농담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치바이스가 생전에 구술한 회고록에는 집의 아궁이에 불을 땐 지 오래돼 물이 고인 자리에 개구리가 울었다거나 힘든 일과를 마치고 못가에 발을 담갔다가 새우에 찔렸다는 등의 일화가 나옵니다. 치바이스 하면 새우가 대표작으로 떠오를 정도로, 그가 그린 새우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이 작품의 평가금액은 약 20억 원에 이릅니다. 새우 한 마리당 2-3억에 달하는 셈이지요. 치바이스의 가난한 시절과 아픔을 상징하는 것이 '새우'이기에 어마어마한 평가금액이 무척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쥐들아, 쥐들아, 어째 그리 많으냐! 어째 그리 시끄러우냐! 내 열매를 씹어놓고 내 기장도 벗겨놓고, 촛불 다 타고 등잔불 어두워진 새벽녘, 한 겨울 이미 오경도 다 쳤는데."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해 나라와 동포를 위험에 빠뜨린 사람들을 조롱한 '군서도' 작품입니다. 치바이스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일본의 침략과 공산주의가 득세하는 등 격변하는 한 세기를 살았는데요. 오후가 되어야 관아에 잠깐 들르는 게으른 관료를 풍자하기 위해 닭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청일 전쟁 당시의 탐욕스러운 일본 침략군을 쥐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치바이스는 생전에 첫 번째로 시(詩), 두 번째로 도장(印), 세 번째로 자(字), 네 번째로 화(畵)라고 말했습니다. 치바이스는 소장한 인장이 3백 개가 넘는다는 의미로 '삼백석 인재'라 자칭했습니다. 그는 도장을 새길 때 글씨를 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글씨를 개칠하지 않듯 칼이 한번 지나간 데에는 다시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의 도법에서는 마치 글씨에서 느껴지는 필력처럼 힘이 느껴집니다.
2부에서는 오마주 작품과 치바이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고 있습니다. 노출된 작품들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고 유리관 속의 작품들은 치바이스의 작품인데요. 현대의 한국과 중국 작가들이 거장에게 헌정하는 작품이 40여 점에 이르러 풍성하고 다채로운 인상이었습니다. 옌부츠, 진위명 등 중국 후난성 현대서가 11명과 권창륜, 박원규 등 한국의 전각가 10명, 사석원과 최정화 등 한국 현대미술작가들의 오마주 작품을 통해 치바이스가 동아시아 서화 미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치바이스의 그림은 특별한 미술 지식이 없어도 쉽게 공감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연과 소박한 일상,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정감이 녹아 있었습니다. 치바이스가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높은 뜻이란 인정(仁情)과 평화(平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전시회 연계 프로그램으로 사석원 작가와 함께 하는 어린이 체험 교실 '내일의 치바이스'가 진행됩니다. 자세한 일정과 신청방법은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http://www.sacticket.co.kr/SacHome/exhibit/detail?searchSeq=33177)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한중수교 25주년 기념 특별전, 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전시회는 오는 10월 8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립니다. 성인 5천 원.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50% 할인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으며 오후 9시까지 연장개관되어 전시회를 좀더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고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며 삶을 예술로, 예술을 삶으로 살아낸 치바이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거장의 깊고 따스한 시선을 이번 전시회에서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