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리랑 in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공연이 막을 내리고 이어진 커튼콜 무대에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배우들이 먼저 시작했고 수많은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뒤따랐습니다. 모두가 기립한 채 나지막이 부르는 아리랑 선율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한 편의 뮤지컬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 나아가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잊히지 않을 생생하고 진절한 이야기를 ‘뮤지컬 아리랑’을 통해 만나보았습니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운명처럼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초연 공연을 함께한 배우들의 말입니다. 성공적인 초연 이후 2년 만에 다시 관객들 앞에 선 뮤지컬 '아리랑'은 42명의 초연 멤버 중 31명이 다시 뭉쳤습니다. 안재욱, 서범석, 김성녀, 윤공주, 김우형 등 쟁쟁한 배우들이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공연장에서 직접 관람한 뮤지컬 아리랑은 '역시'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남다른 여운을 안겨주었습니다. 상업 뮤지컬에서 보기 힘든 묵직한 주제와 그에 어울리는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는 '왜 아리랑이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근 백 년의 역사, 파란과 곡절의 일제강점기... 뮤지컬 아리랑은 지키고 싶은 신념을 이야기합니다. 권력자들이 아닌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의 스토리를 압축하여 무대화한 창작 뮤지컬로서 웅장하고 강렬합니다. 뮤지컬 아리랑은 주인공 송수익과 양치성의 갈등을 주축으로 하면서 이들과 얽히는 감골댁의 가족사를 줄거리로 풀어냈습니다. 특히 송수익과 옥비의 사랑, 수국과 득보와 양치성의 애증이 얽힌 삼각구도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었는데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격류에 휩싸려 자칫 실종될 수도 있는 스토리에 이정표를 더하고 몰입도를 강화한 모습이었습니다.
<인물관계도>
<줄거리>
일제강점기, 김제군 죽산면에 사는 감골댁의 아들 방영근은 빚 20원에 하와이에 역부로 팔려간다. 양반 송수익의 몸종이었던 양치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의병에 살해되자 친일파가 되어 일본 첩보원 학교를 졸업한다. 그 사이 송수익은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이끈다. 한편 감골댁의 딸 수국이와 친구 옥비는 각각 미선소 감독관과 일본인 감찰관 고마다에게 유린당한 뒤, 험난한 인생을 살아간다. 일본의 앞잡이가 된 양치성은 송수익의 행방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평소 연정을 품고 있던 수국이와 강제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만주에서 일본 토벌대의 조선인 살육이 자행되는데…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야기를 2시간 40분(중간 휴식 포함)에 농축하기 위해 극은 빠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1부는 주요 등장인물 소개와 당시의 시대상을 소개하는데 할애되고 2부는 본격적으로 인물 간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인물들이 겪는 고난과 역경이 처절하고, 그만큼 생생한 한恨의 정서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는데요. 완급을 조절하는 배우들의 명연기와 연출가 고선웅의 애이불비(哀而不悲) 정신이 어우러져 슬픔 그 너머의 아리랑이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뮤지컬 아리랑의 수록곡들은 한국적 정서가 녹아있는 선율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진달래와 사랑', '탁탁', '풀이 눕는다', '어떻게든' 등의 곡은 진정성 있는 가사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무대 위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였는데요. 특히 여성 주조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강렬한 연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온갖 파란을 겪는 '방수국' 역 윤공주의 가창력과 소리꾼 '차옥비' 역을 맡은 이소연의 구슬픈 소리는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60년 무대 경력의 배우 김성녀는 한평생 가슴을 치며 살아가는 감골댁 그 자체였습니다. 뮤지컬 아리랑은 부딪히고 깨어지며 스스로를 뛰어넘는 여성 민초들의 모습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고선웅 연출은 "우리의 아리랑은 생명이자 정신 같은 것"이라며 "애통하지만 애통하는데 머물지 않고, 한의 역사지만 한을 가지고 있는 것에만 멈추지 않고, 슬프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는 우리 선조 내면에 흐르는 유전 인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좋아도 불렀고 슬퍼도 불렀던 아리랑. 만주 벌판에서, 하와이의 농장에서, 살을 에는 시베리아의 추위 속에서도 불렀던 아리랑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네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극 후반부에는 일본 토벌대의 감시를 피해 지하 아지트에 모인 민초들이 엎드린 채 소리 죽여 신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 강인한 생명력으로 끝내 일어서는 것이 아리랑의 정신이 아닐까요.
뮤지컬 아리랑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작품이었습니다.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공연이었습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도 기어이 뿌리를 내리고야 마는 생명의 힘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2년 전 초연보다 더욱 깊은 에너지로 돌아온 뮤지컬 아리랑. 기획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태생이 남다른 만큼 한결같은 관심 속에서 꿋꿋한 행보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뮤지컬 아리랑은 오는 9월 3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관람료는 4만 원에서 13만 원까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40% 할인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도 자명하게 여기에 있기까지, 아리랑과 함께 웃고 울었던 선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