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by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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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그게 뭔지 몰라서 어느 유럽의 지명인가 보다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던 것이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직접 고른 책도 아니고, 친구가 먼저 감동하고 너도 읽고 감동해봐라- 강권하던 책도 아니었다. 교수님이 수업 교재로 사용하던 책이었다. 제군들이여 나를 따르라... 아니 이 책을 믿고 따르라! 한 학기 내내 진행된 수업은 오직 이 책을 읽고 음미하고 생각하는데 소모되었다. 학생들로서는 반갑지 않은(?) 강제 독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생들과 교수님 사이에 지적 대화가 오고 가는 본격 토론의 장이라도 열렸다면 더욱 그럴싸했을 텐데, 아쉽게도, 또는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인상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수업을 이끌었던 교수님이 텍스트를 무척이나 다감하게 낭독하시는 바람에, 단순히 모두가 함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 어떤 사람이 거의 백여 년 전의 인물이며 특별한 활약도 없이 오직 소설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남긴 사람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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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읽혔다.' 책을 읽는 행위를 수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상황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연출되었다. 사람 관계에 빗대어 말하자면 어느 한쪽이 거의 스토커처럼 끈덕지게 접근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처음으로 책에 인격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이 사실을 안다면 기뻐했을까? 덕분에 프루스트가 뭔지 모르고 따라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말을 할 수도 없었던 한 사람이 당당히 자기 의사를 피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책이 동쪽의 어느 나라, 어느 대학교의 수업용 교재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면 영광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짐짓 겸손하게 행동하기 위해 당시의 순진한 제군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교수님과의 은밀한 친분을 고백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겁주는 말이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먹혀들어서, 십 년째 프루스트 읽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네. 저는 프루스트가 싫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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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워낙 잘 쓰는 작가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잘 쓰는 작가의 글이 잘 읽히는 건 또 다른 문제이고, 이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취향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애초의 취향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보통을 읽기 전에는 내게 그러한 취향이 있는지 몰랐다. 알 수도 없고 형용하기도 어려운 취향-고유한 느낌이나 감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라는 것이 이를테면 갑자기 솟아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無에서 유有가 생기는 저 창세기의 사건에 비견할 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내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면 왜 나는 당신처럼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되는 걸까? 책 속에 저자가 독서 체험에 대해 고견을 피력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구절은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이 동시에 하는 말이다. (작은따옴표로 묶은 부분이 프루스트의 말이고 나머지 부분을 보통이 완성했다.) 두 사람 모두 대중에게 독서의 유익을 설파해야 할 직업적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비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내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는 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야. 아주 멋진 일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에게는 대가들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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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은 대가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글을 썼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가피하게, 정의상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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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여기서 실천적이라는 말은 아마 실용적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나 싶다. 프루스트의 책을 모국어로 섬세하게, 낱낱이 읽은 것이 분명하고 더욱이 책까지 쓴 보통에게는 그 이상 확고할 수는 없는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프랑스인들조차 '프루스트 읽기'와 '실천적 혹은 실용적'이라는 말을 매치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작 프루스트 본인은 자신의 장편 소설이 실용 서적에 버금가는 유익함과 편리성을 갖추고 있는 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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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기 서술을 따르자면, 프루스트는 일평생 무익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 끌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천착한 것은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들렌과 한 잔의 홍차뿐만이 아니라 불면증,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건강염려증, 애정에 대한 끝없는 갈구, 친교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 등이 있다. 심리적인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도 함께 뒤따랐다. 천식 때문에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기이한 일상이 죽는 날까지 이어졌고, 그나마 잠드는 과정조차 쉽지 않아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소화 능력이 결여되는 바람에 속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자다가도 깨어나는, 어쩐지 동화 속 잠 못 이루는 예민한 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프루스트가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비씨 광천수 1/4잔이 한계였다고 한다. 그 이상을 마시면 잠들지 못했다.) 어쩌다가 외출할 일이 생기면 추위에 졸도하지 않기 위해 외투를 여러 벌 껴입었고, 심지어 공식적인 만찬 자리에서조차 외투를 벗지 않았다. 자주 이용하는 택시는 밖의 질 나쁘고 유해한(!)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늘 굳게 닫혀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햇빛 없이 사는 인간, 피부 없이 태어난 인간이었다. 저자는 프루스트를 상상적 환자로 진단하는 대신 그의 예민성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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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때려잡을 수 있는 아픔의 정도란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벼운 감기 기운에 불과한 것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실제적이고 강력한 이유가 된다. 후자의 사람들, 즉 끽소리도 못할 만큼 열렬히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변명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 무례하고 잔인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상황을 재빨리 타고난 불운으로 해석해 버리고, 약간의 연민을 내비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다. "프루스트는 저주스러운 체질의 소유자였으며 일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갔다, 그다음 주목할 건 뭐지?" 하지만 살아생전의 프루스트라면 할 말이 많다고 느꼈을 것이다. 특히 주제가 고통이라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병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목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을 과정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덧붙인 주석에 따르면, 고통스러울 때에만 철저한 탐구심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게 살아간 프루스트가 자신의 견해에 낭만적인 감상을 섞었을 리는 없다. 고통 자체를 생각해보라. 비씨 광천수를 실수로 많이 들이키는 바람에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끔찍하게 뒤척이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고상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근육통 혹은 위의 통증과 함께 뒹구는 밤-프루스트의 경우에는 낮-을 백번 양보해서 견딜만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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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주목한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이 암시하는 어떤 가능성이다. 앓고 난 뒤에 생기는 슬픔이 씁쓸한 진리로 이어지는 과정은 필연적이다. 고통은 우리를 깨어나게 만든다. 멀쩡할 때는 쉽게 외면할 수 있었던 삶의 진짜 모습이 고통 속에서는 생생하게 떠오른다. 일례로 아파서 몸서리치던 순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의 허점을 지적할 수도 있고, 더 넓게는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체념하거나, 또 다른 가능성을 찾도록 이끈다. 어느 쪽이든 이전과 다른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인생에 대해 깊이 있는 증언을 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고통스럽게 변화되길 촉구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감히 연민을 떠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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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 못할 정신적, 육체적 문제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대작을 집필한 작가로서의 역량을 의심케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영감으로 바꾸었다. 저자는 이것이 사물을 느끼는 능력, 그것도 고통스럽게 느끼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다음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 불면증에 대해 길게 서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까. 성공적이며 친교에 대해 변치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친교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없다. 다양한 계층의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그들에게서 무언가 항상 잘못된 것들을 발견했던-그것도 자주 고통스럽게- 프루스트는 자신의 실망감을 인간 본성에 대한 슬픈 이해로 확장시킨다. 그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진실을 고백한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적었는지 보면서 무한한 슬픔에 빠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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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혼자) 상처받고, (혼자) 치유하고, (혼자) 냉소하던 사람이 마치 친구들과의 우정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완벽한 사교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의 끈질긴 추적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꽃과 스포츠 경기와 주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친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음이 드러난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프루스트에게 그리 흥밋거리가 되지 않는 분야였다는 사실이다. 개중에 어떤 화제들은 프루스트의 기질을 놓고 보자면 오히려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대한 관심’으로 그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을 만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 친교의 화신은 화제가 어긋나 친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은밀하고도 가련한 희생을 친구들이 알아챈다면, 즉 거짓 리액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친교든 뭐든 박살날 것이 분명하기에, 프루스트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친교하는 프루스트는 정말로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고 꽃줄기가 길거나 짧은 것에 무척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으며, 한 여배우의 발치에 온몸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는 풋내기 로맨티시스트였다. 결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프루스트의 친구들은 누구나 그에게 매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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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장 맞을 사교적 스킬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잠시 유보하라고 말한다. 그의 호의와 친절이 사악한 계획을 품었거나 조롱하기 위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확실히 까다롭고 단정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분명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애정이다. 프루스트는, 아니 다감하게 마르셀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이 남자는 그냥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프루스트가 모든 만남에서 가장 우선시했던 것이 남들이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고 좋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
프루스트가 생각하는 '친교'란 애정을 확인하는 아름답고 극적인 체험이었다. 친교가 실패한다면 애정을 확인받을 길이 없기에 여러 가지 안 좋은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관심사의 불일치였다. 때문에 그는 ”항상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되기로 하고, 적합한 꽃과 미소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타고난 능력-사람을 읽는 능력-을 쏟아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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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노력과 예지력과 자기희생 정신에도 불구하고, 친교가 늘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행하게 드러난다. 죽어가는 심정으로 쓴 소설-매일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내지만, 친구는 소설을 읽지 않았고 심지어 무척 놀라서 프루스트에게 ‘네가 소설을 썼어?’라고 묻는다. (프루스트가 오랫동안 문학에 전념했고 따라서 소설을 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우정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무관심이 문제라고 한다면, 또 다른 친구로부터 받은 실망감은 신실한 우정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충격을 안겨준다. 동성애자였던 프루스트에게 그것은 가슴 아픈 로맨스였다. 자주 전기가 오고 갔던 택시 기사 오딜롱 알바 레가 나중에 자신의 하녀가 되는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 프루스트는 가까스로 축하의 전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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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죽기까지 11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잃어버린 소설을 찾아서’는 이를테면 보내지 않은 편지이다. 소중한 우정을 위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문자화 된다. 작가 프로스트는 의심하고 냉소하고 나비의 그림자까지 추적하지만, 현실의 마르셀은 여전히 의심할 수 없는 좋은 친구로서 친구들을 즐겁게 할 파티를 준비하거나, 독창적인 선물을 고르느라 고심한다. 그가 죽었을 때 친구들이 저마다 경쟁하듯 펴낸 회고록 속에서 인간 프루스트는 살아생전 사랑받았음이 드러난다. 죽은 프루스트가 알았다면 울어버릴지도 모를 깊고 신실한 애정이 거기에 있었다. 사실 프루스트는 사랑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었다. 특히 고통과 애정과 진실에 관한 한, 그 만한 전문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전투적으로 진리와 애정을 동시에 추구하기보다는 분별 있게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두 가지 목적을 분할하여, 국화와 소설을, 로르 아이 망과 오데트 드 크레시를, 보내는 편지와 쓸 필요는 있지만 숨겨두는 편지를 현명하게 분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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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프루스트를 본받으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독자를 충동질할 게 뻔하니까.) 대신 따스한 연민의 시선으로 프로스트를 바라보며,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리가 주위 사람과 사물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즉 습관과 냉소와 가짜 친숙감에 휘둘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삶의 마법에 대해서 말이다. 저자는 또한 독서와 글쓰기 행위에 아스피린 못지 않은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다는 믿음을 독자에게 선사해준다. 방대한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한 권의 실용서적 못지않은 효능이 가지고 있다는 견해는 어떠한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한때 책 밖에서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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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잠 못 드는 부분을 여러 번 읽다가, 역시 안 되겠어서 때려치웠다. 프루스트의 문체를 사랑하기에는 끈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누구도 나한테 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열심히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 리도 없다. 대학교 시절이라면 의무감에서라도 읽겠지만, 그 시절의 나는 왠지 토익 공부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정독한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다. 듣던 대로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악성 환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지, 그들을 치유시키는 해독제도 함께 암시되어 있는지. 그들이 끝까지 어리석게 구는 바람에 불행해진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는지,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슬퍼했는지, 궁금하다. 가끔씩 나 자신을 보통이 작성한 악성 환자의 리스트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그들이 슬퍼했다면, 왠지 잔인하게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프루스트가 이들 가운데 있다. 미친 사교 스킬은 어디로 가고 맨 뒤에 소심하게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