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일상 속으로 걸어들어올때

영화 부활을 보면서.

by 은혜




1

고질적인 통증과 울적함, 지독한 패배의식이 한데 뒤엉켜 구르는 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귀를 기울이는 대신 마음을 사립문처럼 열어두었다. 충분히 드나들 수 있도록,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한낱 부는 바람인 것처럼 오래 버려두었다. 잠이 들기까지 네 시간 정도가 걸렸을까. 아침이 되어 집 근처 텃밭에 핀 나팔꽃을 보았다. 구김 없는 찬연한 빛깔이 피로한 눈을 찔러왔다. (이번에도) 내가 다시 한번 죽었다가 깨어났음을 느꼈다.



2

이런 아침은 어째서 고통스러운 밤을 통과해야 찾아오는 것일까. 나팔꽃이 아침의 영광이 되는 순간은 왜 거저 오지 않는 것일까. 고통이 여과되어 쓰게 흘러나오는 환희. 그리고 부활의 기쁨. 죽음을 한 방울의 남김없이 모두 쏟아낸 후에야 찾아오는 부활. 예수님의 부활이 완전하고 눈부신 것이었음을 지난밤의 고통으로 다시금 깨닫는다. 나의 고통은 물론 하찮은 것이겠지만… 살아가면서 질병 때문에, 크고 작은 문제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체 무슨 권리로? 알 수 없지만 부활의 단어가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에야 나는 비로소 순해진다. ‘빛나다’와 ‘누추하다’라는 형용사들이 서로를 꼭 껴안은 모습이 되면서 꼭 그 같이 물든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신께 감사하게 된다.



3.

영화 부활 속의 예수님은 특별히 흠모할 만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검은 곱슬머리에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뭉툭한 코. 다만 눈 속에 선한 감정이 흘러넘쳤다.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 말이나 먼저 꺼내고 싶을 정도로 선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이런 분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인상만을 놓고 본다면 가장 고증에 가깝고 가장 현실감 있게 묘사된 예수님이 아닌가 생각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실감 나게 느껴질 만큼, 그토록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영상으로 본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4.

영화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자가 아닌 불신자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조명하고 있다. 주된 장치는 추측, 추리, 추격이다. 사람들을 미혹하고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한 유대인 남자의 시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 속에서 피치 못할 오해와 극적인 반전이 뒤따른다. 무엇보다 ‘반전’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지만 엉뚱한 곳에서 삽질하는(?) 부분 역시 살짝 재미를 가한 듯 흥미롭게 전개된다. (정신 나간 사이비 집단으로 취급당한 예수님의 애제자들이여.)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극의 분위기는 특별히 어둡지 않고 오히려 마법 같은 기대와 설렘이 있다.







5.

주인공 격인 호민관 클라비우스는 군인 정신과 합리적인 사고의 지배 아래 움직이는 사람이다. 야망이 있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지만 해가 갈수록 어쩐지 전쟁터와 같은 일상에 대한 회의가 커져간다. 어느 날 상사인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십자가에 달린 어떤 유대인 죄수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시신을 친족으로 보이는 이에게 넘겨주면서 마무리된 것 같던 상황은 시신이 사라지면서 미궁에 빠진다. 그는 없어진 시신을 찾는 일에 자신의 안위가 걸려있음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수사 끝에 병력을 이끌고 불순한 무리들이 숨어있는 어느 외진 마을에 도달한 클라비우스. 멋진 기습과 성공, 그리고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끌려 나오는 사이비 무리들을 기대했으나...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하고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두 가지 모순된 사건(한 남자가 죽고, 다시 살아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혼자 고뇌하는 대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며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신분과 지위 탓에 제자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이지만 그럼에도 빠짐없이, 분명하게, 예수님의 부활 행적을 체험한다.



6

영화 속 부활의 예수님은 바람 같았다. 바람처럼 잠깐 머무르시고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지셨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셨다. 다만 바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살과 뼈를 가진 육체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손에 끔찍한 못 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 더욱 기이한 기분이었다.) 예수님의 부활 행적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무척 유머러스하다. 처음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신다. 성경을 보면 너무나도 기막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잠자코(?) 구운 생선 한토막을 드신다. 아, 죽음을 이긴 위장이여! 먹는 행위를 통해 부활을 증거 하신 예수님의 유머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걸까. 극중 제자인 바돌로매가 증거한 것처럼 그 분은 살아계신 분이며 모든 곳에 계셨다.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숨긴 나그네로, 다시 신의 아들로 변모하기까지는 눈 깜박이는 시간이면 충분하고, 그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의 믿음의 눈....



7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셨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를 사랑하니?” 베드로는 참을성 있게 세 번이나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해서 괴로웠던 베드로의 마음을 깨끗이 치료해주셨다. 영화 속에서는 호민관 클라비우스와 단 둘이 대면하시기도 한다. 예수님의 부활 행적을 쫓으며 마음에 동요를 느낀 클라우비스가 이렇게 묻는다. "이게 진실인지, 모든 걸 걸어도 되는지…” 영화 속의 예수님은 그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에게 결정할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고, 그저 함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신다.





8.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헤어진 호민관 클라우비스는 직분으로 돌아가는 대신 기약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활의 행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음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선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면의 지형이 바뀌었다.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적이란 건 아예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에게는 삶의 목적이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9

나는 영성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고 배우려는 열망도 다른 분들에 비하면 하잘것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깨달은 것들이 있어서 이때까지 버텨왔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되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든,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깨닫게 되길 바란다. 언젠가 신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삶이었노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그분을 믿으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하고 싶다.
어제는 밤이 길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길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 지나침 없이 겪어내며 씩씩하게 걸어가길. 한동안 박대하며 괴롭혔던 내 마음에게도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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