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전시회 in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전 세계인이 애송하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는 실연의 아픔 속에서 써졌습니다.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은 화가 마리 로랑생. 당대에 보기 드문 여성 화가이자 천재 시인의 뮤즈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오늘날 마리 로랑생은 그녀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기반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서 있습니다. 국내 최초,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 로랑생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마리 로랑생 전시회는 예술의 전당과 가우디움어 소시에이츠, KBS가 공동 주최하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입니다. 70여 점의 유화와 석판화, 수채화, 사진과 일러스트 등 총 160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은 한국인들에게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더욱 알려져 있는데요. 그녀 자신이 훌륭한 화가이자 시인이며 북 일러스트 작가로서 일평생을 예술가로 살아갔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힙니다. 무엇보다 색채를 다루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데요. 애틋한 핑크와 황홀한 블루, 우수가 감도는 회색 등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색채야말로 마리 로랑생만의 스타일입니다.
전시는 무명작가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전 시기의 작품을 작가의 삶의 궤적에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 '청춘시대' 섹션과 2부 '열애 시대'에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한 초창기 작품들이 공개됩니다. 3부 '망명 시대'는 결혼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스페인으로 망명 생활을 떠나게 된 시기입니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 등이 자신만의 색깔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4부 '열정의 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마음의 고향이었던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시기의 유화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제5부 ‘컬래버레이션’ 섹션에서는 북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의 성취를 살펴볼 수 있는 38점의 수채화와 일러스트 작품들이 전시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예술의 세계, 특히 그림에 일찍히 매료된 마리 로랑생은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입체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화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실이자 전 세계에서 파리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세탁선(Bateau-Lavoir)을 드나들며 기욤 아폴리네르, 앙리 루소 등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를 일궈나갔습니다.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은 입체파와 야수파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절 마리 로랑생은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열애에 빠지는데요. 하지만 두 사람의 열애는 엉뚱하게도 1911년 벌어진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기욤 아폴리네르가 연루되면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망명 생활을 거치며 마리 로랑생은 색채에 대한 섬세한 사용과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1920년대는 파리지앵이 가장 사랑하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집니다. 전남대학교 미술사학과 정금희 교수는 “마리 로랑생은 윤곽선을 없앤 1차원적 평면성과 부드럽게 녹아드는 듯한 파스텔 색채만으로 평안함을 주는 형태를 완성했다”며 “이는 그림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 했던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마리 로랑생은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들, 형체가 모호한 동물들, 우울하면서 동시에 위로를 내포하고 있는 세계를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초창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감내하는 듯한 표정은 꿈을 꾸는 듯한 검은 눈동자 뒤로 숨어버리면서 좀 더 깊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의 직관을 갖지 못했다면, 단순히 입체파나 다다이즘을 모방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 로랑생은 파블로 피카소, 조지스 블라크,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완성해낸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마리 로랑생이 그린 작품 속의 여성은 풍만한 몸매가 강조되거나 나른한 눈빛으로 관람객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주로 여성들을 그렸지만, 어떤 그림들은 크게 여성을 의식하기 어려울 만큼 성별이 모호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윤곽선을 없앤 평면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여성들은 오히려 쉽게 식지 않는 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이 흐르는 듯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포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기존 미술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여성의 눈으로 본 아름다운 여성성을 포착해낸 모습입니다.
10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세 명의 여인들'은 한국 전시만을 위해 관람객들에게 특별히 촬영이 허용되었습니다.
말년에는 노랑, 빨강 등 한층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합니다.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하는데요. 작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예술 혼을 불태웠습니다. 1956년 6월 8일,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됩니다. 한 손에는 흰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시집을 출판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그를 그리며 시를 씁니다. '밤의 수첩'에 수록된 이 시는 한국에는 '잊혀진 여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원제는 '진정제'입니다.
지루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보다
잊혔어요.
- 잊혀진 여인(진정제)
전시 후반부에는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을 비롯해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시를 직접 필사해보고 시 낭송을 감상해보는 특별한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그림을 통해 구원을 꿈꾸었던 화가 로랑생.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인생사와 작품 세계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구성되어 있는 점이 돋보였습니다. 유화에서 일러스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코코 샤넬 초상화'(현재 프랑스 파리 오랑제리 미술관이 보관)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웠습니다.
마리 로랑생 전시회는 내년 3월 11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성인 입장료는 13000원입니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당일 오후 6시에서 8시 사이 입장 시 기본가에서 50% 할인됩니다. 또한 오후 9시까지 야간 연장 개관이 진행되므로 좀 더 여유롭게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문화가 있어서 즐거운 일상, 황홀한 색채가 펼쳐지는 마리 로랑생 전시회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