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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Apr 07. 2018

테이블, 진정한 시작의 자리

하림과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의 '집시의 테이블'



긴 여행 끝에 찾아온 휴식이다.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에는 다양한 악기를 가진 사람들이 둘러앉아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이제 막 뒤풀이를 하려는 듯 왁자지껄한 분위기다. 그중에는 가면을 쓴 묘령의 남자가 있다. 어깨를 들썩이거나 발을 구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남자...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난 4월 1일, 대학로 TOM 2관에서 '집시의 테이블' 막공이 열렸다. 하림과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음악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 시작 전, 무대 가운데에는 만찬석을 떠올리게 하는 길쭉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콘트라 베이스와 크고 작은 기타들이 어둡고 신비로운 느낌의 조명 속에 잠겨있었다. 조금 있으면 잠에서 깨어날 악기들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무대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은 언제나 좋다. 공연은 예상 시간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월드 뮤직은 여행과 같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왼쪽부터 하림, 김목인, 조윤정, 이호석, 이동준, 김현보, 정명필 뮤지션


여행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음악을 만나는 것을 천직으로 삼는 뮤지션 하림은 '한국의 집시'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가 제작한 월드뮤직 퍼포먼스 '집시의 테이블'은 직접 전 세계를 여행하며 얻은 음악적 감성을 고스란히 무대 위에 재현한 작품이다. 하림은 각 나라의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전통음악을 통해 본인의 음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집시의 테이블' 공연에 대해 "월드뮤직은 여행과 같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라고 표현한다.  


마임 연기를 펼친 '여행자' 이동준 씨


가면을 쓴 남자는 이제 막 여행길에 오른 풋내기 여행자이다. 그는 익명의 수많은 여행자들을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프랑스, 그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는 음악 여정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다. 배낭 하나에 의지하여 타지를 여행하고, 아름다운 집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배신을 당하고, 다시 사랑하면서 성숙해가는 모든 과정이 유쾌하면서 진지하게 펼쳐진다. 어떤 경우에도 맨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뚝심의(?) 여행자. 그가 가면을 벗는 모습이 딱 한번 등장한다. 모든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할 때이다.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만, 여행을 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 오직 의미에 집중할 수 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음악과 함께 하는 여정이기에 혼자여도 외롭지 않다. 낯선 외국을 떠돌아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다. '집시의 테이블' 공연은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 든다. 출연진도 관객들도 풋내기 여행자, 혹은 집시가 되어 웃고 떠들고 함께 노래한다. 이런 자리에 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술병이 몇몇 관객석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진짜로 마시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덕분에 한층 더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이밖에도 '집시의 테이블' 공연에는 크고 작은 위트가 넘쳐났다. 80분이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앵콜 공연 무대 모습


비록 소품의 수준이라지만 술병까지 있는데 당연히 춤이 빠질 수 없다. 즉석에서 울려 퍼지는 라이브 음악에 맞춰 아이리쉬 댄스, 스윙 댄스가 차례차례 이어졌다. 이들 중 아이리쉬 댄서 분의 씩씩한 발재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관람객들 중에 무작위로 선별된 사람과 출연진들이 함께 아이리쉬 댄스를 배워보는 시간도 있었다. 한편 실제로 커플이라고 밝힌 스윙 댄서분들의 무대는 열정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만큼 뜨겁고 화려했다.



진행과 연주를 함께 선보이며 공연을 이끈 하림을 비롯하여 멋진 월드뮤직 퍼포먼스를 보여준 출연진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들이 뒷풀이 수다를 떨듯이 들려준 흥겨운 음악으로 인해 여행의 감성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일상이 숨 막히도록 답답해서, 갖은 의무와 책임에 지쳐서, 혹은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사람들은 먼 곳으로의 여행길에 오른다. 늘 망설였다면,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떠나고 싶다. 용기보다 광기가 필요할 만큼 쉽지 않은 문제라면 살짝 미쳐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 저 가면의 사나이가 끝까지 가면을 고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면을 쓰면, 간단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테이블, 진정한 시작의 자리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과 관객들이 함께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보고픈 사람들 /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 랄라라 랄라라 여행이 끝나고 나면 / 텅 빈 배낭 가득한 방으로 / 집으로 돌아갈래 / 집으로 돌아갈래" 공연 막바지에 흘러나오는 '배낭여행자의 노래' 가사이다. 지금은 여행 중이라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는 말, 진부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실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 더 잘 살아있기 위해서 죽어보기도 하는 것 등등... 원점에는 테이블-모두가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식탁-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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