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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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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15. 2021

다 내려놓고, 일기


까페에서 권민경 시인을 만났다. 대화 끝에 그가 나에게 내린 처방은 일기였다. 다 내려놓고, 일기부터 쓰라고 말했다.


물론 평범한 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혹은 포착하려고 애쓰는 일기가 필요하다. 그런 일기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기술과 목적을 갖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기를 과연 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노트북에는 으레 그렇듯, 날 것 그대로의 짧은 글들이 가득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진짜 일기들이 저장되어 있다. 개중에는 불 속에서 화형되야 마땅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죽고 싶어 죽이고 싶어 배고파 언제 와? 미친 여름이다 착한 개새끼 그게 바로 너야... 등등  


어떤 날은 일기를 쓰고 나면 어쩐지 후련했다. 어떤 날은 일기를 써서 오히려 가슴이 답답했다. 진짜 일기는 '쉬워서', 혹은 '불편하고 쓸모 없어서' 내게서 빠르게 잊혀졌다. 쓰고 나면 그 뿐이고, 다시 생각나서 찾아보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불순한 일기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다시 꺼내서 읽고 싶은 일기, 내가 썼지만, 내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 같은 일기... 그런 일기라면 이렇게 브런치에도 쓸 수 있고, 설령 불특정 다수가 보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일기를 쓰는 내가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시작하려고 한다. 귀찮아도 꾸준하게 써볼 것이다. 그러다가 일상이, 일기가 시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다음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즐겁게 잠을 청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202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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