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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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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15. 2021

불면(不眠)

잠의 강변을 함께 걷고 싶다.


1 발화

이상한 일이다. 밤에 잠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루 종일 몸을 피곤하게 굴려도 마찬가지이다. 어렵사리 잠드는 데 성공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 3시나 4시쯤 잠에서 깬다. 다시 잠을 자려면 갖은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 잠이 많을 뿐 아니라 한번 잠에 들면 죽은 듯이 자는 나에게 이건 기이한 현상이다. 여러 날 동안 불면의 원인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떠오른 '2차 백신 접종'. 그런데 접종 부작용 중에 불면증이 있던가? 게다가 나는 2차 접종을 한지 보름이나 지났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내 상태를 얘기했더니 백신 부작용 중에 불면증이 보고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평소 자율신경계가 약한 사람이면 그럴 수 있다고. 나는 속으로 '재수 없구나', 생각한다. 나에게 잠은 밥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누군가 날 고문해서 비밀을 발설하게 하려면, 그냥 잠을 못자게 하면 된다.


2 변주

밤인데 잠을 못잔다. 나는 밤에 자는 사람. 그런데 이제는 밤에 깨어있는 사람. '깨어 기도하라!' 이건 성경 말씀. '아, 잠이 없어지니 현실이 없어지는구나' 이건 김행숙님의 말씀. "난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좋더라.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잖아." 이건 친구의 말씀. '그럼 이제 나를 떠날거야?' 밤인데 잠을 못잔다. 나는 밤에 깨어있는 사람. 낮에도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루종일 잠을 자지 않고도 버티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과 함께 강변으로 소풍을 떠나고 싶다. '여기서는 잠들어도 괜찮아요' 둥글고 끝이 없는 잠의 강변을 함께 걸어가고 걸어가고...걸어들어가서 영원히 나오지 않고 싶다. 그 때처럼 검은 새 그림자가 날아오고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새는 하늘과 강물의 경계에서만 살아가지. 하나 둘... 다섯을 세기도 전에 그림자는 날아가고 없다.

 

3 확장

저녁부터 잠에 들 준비를 한다. 숙면에 도움을 주는 차를 마시고 가볍게 요가를 한 다음 자리를 펴고 눕는다. 그때 카톡이 온다. '너 그거 알아? 황XX이 목회자 아들이래.' '어 알아.' '그래...' 어쩌구저쩌구. 다시 눈을 감는다. 전기장판을 미리 켜두어서 다행이다. 팔다리가 금세 따뜻해진다. 오늘 밤에는 어쩐지 잠이 잘 올 것 같다. (...)  새벽 4시. 잠에서 깬다. 목이 엄청나게 아프다. 머리맡에 두었던 물을 마시고 다시 눕는다. 오늘에는 김근태 도서관 관장을 미니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늦어도 오전 열시 반까지 가야한다. 딱 세 시간만 더 자자. 나는 시방 돌멩이다. 나는 나무다. 나는 열매다. 나는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진다... 얇은 생각 얇은 잠 얇은 꿈들이 지나간다. 또다시 피곤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밝아온다. 요즘에는 일도 사람도 힘들 것이 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불면 때문에 더 심해진 까칠함이다. 그것을 되도록 들키지 않도록 간수하고 숨기는 일이 힘들다. '일 끝났어? 얼른 집에 들어가서 자.' 내 불면을 알게 된 친구가 걱정을 해준다. 그는 걸핏하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잠 한번 푹 자보는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더러 운동을 하라는 둥, 뭐는 먹고 뭐는 먹지 말라는 둥 잔소리를 한다. 일이 끝난 다음  중랑천을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나는 배가 고파졌다. 무던하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4. 사족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때 뭐라고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잠이 오지 않는 밤, 기억이 강도처럼 쳐들어와도 나는 모른척 할 것이다.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이 서로 다르므로. 서로 다른 언어로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모른척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의 기억이 내게 찾아온다면,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약하지만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소리. 여긴 동굴 속인가?  꿈 속에서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누군가의 심장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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