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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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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15. 2021

할반지통(割半之痛)

부서진 길이 열릴 때

1

11월 1일. 단골 미용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핸드폰 너머에서 낮고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원장님이 가족상을 당하셔서요. 그래서 예약을 부득이하게 취소할 수밖에 없어서 전화드렸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가족상이요? 누구요?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나요?" 직원이 다시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원장님의 언니분이 사고를 당하셨어요. 머리 예약하신 분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고 있는데요. 다다음 주까지는 원장님이 미용실에 복귀하기가 힘들실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멍해졌다. 언니가 죽었다고? 어떡해....



2

삼 년 가까이 알고 지낸 미용실 원장이다. 털털한 매력과 야무진 솜씨에 반해서 머리를 해야 할 때마다 찾아갔다. 미용실이 집에서 먼 곳에 있느라 찾아가는 것이 귀찮은데도 꼬박꼬박 다녔다. 염색도 하고 펌도 하고 헤어클리닉도 여러 번 했다. 머리를 할 때 나는 대부분 미용사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는 편이다. 간단히 요구 사항만 말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원장과도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날 때면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이 되곤 했다. 서비스 업계에서 오랫동안 종사한 사람답게, 그는 손님의 기분이나 안색에 민감한 편이다.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 찾아가면, 그는 말없이 가위질만 한다. 내가 어쩐지 들떠서 입이 근질거리는 날이면, 그가 먼저 알고 말을 걸어준다. "끝나고 어디 가요? 데이트하러 가요?" 그는 남자처럼 숏컷을 하고 노랗게 물을 들였는데, 나는 그 머리를 볼 때마다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숏컷이 잘 어울리는 멋진 여자는 보기 드물다고, 생각했다.



3

언니가 죽었다고? 남은 가족들은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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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곱슬머리가 창궐하는데, 꾹 참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곱슬머리가 창궐하는데, 한숨이 나오지만 참는다. 일 년에 한 번은 볼륨매직을 해야 하는 선천성 곱슬머리. 작년 이맘때쯤 볼륨매직을 하다가 두피가 상한 뒤로 더욱 곱슬거리는 것들이 줄기차게 올라오더니, 이제는 머리 전체를 장악해버렸다. 그때 원장이 볼륨매직을 하고 싶어 하는 나를 말렸던가? 아니면 내가 한사코 고집을 부렸던가? 그는 내 두피가 예민하기 때문에 염색도 펌도 자주 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었다. 정 하고 싶으면 일 년에 염색 한 번, 펌 한 번만 하라고 했다. 작년 이맘때쯤 볼륨매직을 했고, 올해 여름에 염색을 했으니, 이제 다시 볼륨매직을 할 차례인데 언제까지 기다리지... 아니 그런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원장이... 그러니까 원장의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해...



5

다시 미용실을 가게 되면, 원장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언니를 잃은 그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형제자매를 잃은 슬픔을 일컬어 통상 할반지통(割半之痛)이라고 말한다. 몸의 반쪽을 베어 내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죽었는데도 다시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고통이다. 내게도 남동생이 하나 있다. 그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서 나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살갑고 정답게 지내는 사이가 아닌데도 그렇다. 동생은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이지만 쇠심줄처럼 질긴 구석이 있다. 가족들에게조차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얘가 요즘 풀이 죽을 대로 죽어서 지내는데, 내 속이 체한 것처럼 좋지 않다. 아무리 정이 안 가도 형제자매란 그런 존재다.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훨씬 크고 강한 것이다. 살아생전 언니를 대하던 원장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행복하고 무탈하게 살아주었으면, 그리고 나보다 오래 살아주기를, 제발 나보다 먼저 떠나지 않기를 바랐을텐데.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은밀한 이기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은 항상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부서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살아가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자들은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6

사별을 파괴적인 경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경험자다. 누구나 경험자이다. 크고 작은 파괴의 생생한 경험담들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철저히 부서진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서지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나요?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괜찮은 척하면 정말로 괜찮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상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다시 돌아가려고 애써도 안된다. 부서진 사람에게는 부서진 길이 열린다. 상처투성이인 그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내가 외면했던 상처들이 목소리를 갖고 말하기 시작한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야 내가 얼마나 아픈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애써 감추면서 강한 사람인 척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도 마음도 흔들려야 한다... 그렇게 아픈 길이 열리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아픔이 이질적이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부서졌을 때 모든 사람에게 열렸던 길이다... 상을 당한 원장이 다음 주부터 미용실로 복귀한다.  나는 이전처럼 머리를 하러 그에게 갈 것이고, 그는 나와 같은 손님들을 다시 상대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가... 사랑의 길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 길을 통과하면서 새로워졌으면 좋겠다. 모쪼록 그의 고통과 슬픔이 다른 색깔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의 곁에 그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오늘밤 나의 기도이다.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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