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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Jan 14. 2022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박준, 꾀병


나는 유서도 못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째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꾀병 _ 박준

                                                           



최근 가까운 친구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 왈 "그 여자애가 그때 박준 시인이랑 교제 중이었다는 거지. 아마 박준 시인의 마지막 여자 친구가 아니었을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진짜?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건데!" 박준 시인의 첫 시집을 통해 시의 세계를 알게 된 나였기에 당연히 귀가 솔깃했다. 당시 친구는 교회 청년부 임원이었는데, 새내기 신자들을 챙기던 와중에 그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서로 친해지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박준 시인과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 여자는 친구에게 유명인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박준 시인은 문단계의 핫한 아이돌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진지하게 사귀는 관계였지만 결혼으로 이어지는 인연은 아니었던 걸까. 전해 들은 바 그들은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한다. 박준 시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해서 유부남이 되었다. 벌써 8년 전의 이야기이다.


박준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을 다시 펼쳐본다. 이 시집에는 '미인(美人)'이라는 특별한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시에도 '미인'이 등장하여 '나'의 이마를 짚어주거나, 외출해서 돌아와 나의 잠든 모습을 오래 지켜보기도 한다. 나와 미인은 어떤 관계일까.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어떤 병'이다. 나와 미인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어딘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서'와 '유언'이 필요할 정도로 가망 없고 치명적인 성격을 띤다. 이 시에서는 먼저 나의 병이 넌지시 언급된다. 그런데 어쩐지 미인의 이마가 나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 곱게 차려 입고 문 밖으로 나가는 미인은 다신 나에게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 그리하여 '나' 역시 장례를 치르듯이 삼일 내내 앓고만 있고... 그렇게 미인의 부재함에 나의 부재함이 나란히 포개어지며 그리움은 곱절이 된다. 그런데 부재와 상실, 그리고 불통(不通)하는 고통이 이 시의 전부는 아니다. 열병이 가시고 눈을 뜨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감각하는 일이 그려지고 있으니까. 그 또한 깨이지 않은 꿈일 수 있지만, '나'는 새벽을 거쳐 도착한 볕을 만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다.


어느 인터뷰 지면에서 박준 시인이 밝힌 바 있다. 그가 즐겨 쓴 '미인'이란 단어는 여성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간 사람인데, 공통점은 부재한 사람들이라는 것.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아름다웠다. 지금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죽었거나, 시인 자신과의 관계에서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가 시를 쓰는 사람인 이상, 그의 '미인'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함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오래 묵은 비밀을 꺼내듯이 친구가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박준 시인의 지난 연애사에서 나는 또 다른 미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 미인은 이제 시인의 곁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하게 되는 사람이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박준 시인이 결혼하여 잘 살고 있듯, 그 역시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까? 어찌되었건 시인의 기억 속에서 그 여자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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