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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Apr 05. 2016

[애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숨겨진 의미 읽어내기 (1)



- 소년, 별을 삼키다.  


 좋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생긴다. 시간이 흘러 스토리나 대사가 생각나지 않아도 어떤 장면은 스냅사진처럼 고스란히 떠오른다. 십여 년 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았을 때는 밤하늘에 호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이 자꾸 생각났다. 호수 부근에 떨어져 깨어지고 다시 총총 튀어가는 별 부스러기가 참 별나 보였다. 딱히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니 소년 하울뿐인데 왜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그들의 비행은 언뜻 보기에 유희 같았지만, 사실상 죽음의 의식이나 다름없었다. 지상에 몸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일이었다. 유성의 자유낙하에 의지가 있을 리 없지만 애니메이션 속의 유성들은 왠지 사람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봐주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제야 화려했던 난리굿도, 그 밤에 혼자 호수에 나와 있었던 소년 하울도 이해되었다. 소년은 몽유병인 것도 아니고 한가롭게 나들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울은 떨어지는 별들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다. 일종의 참관인 역할을 하다가,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언장 대신 평생 계약서를 받아낸 것이라고 해야 할까. 소년 하울은 죽어가는 유성 하나를 붙잡아 껴안는다. 그리고 꿀꺽 삼켜버린다. 소년의 가슴께에서 불이 일렁이는 작고 뭉클한 것이 빠져나온다. 그렇게 소년의 심장을 가진 유성은 다시 소생하고, 소년은 별의 힘을 지닌 독특한 사람으로 자라난다.




- 도대체 하울의 심장이 뭐길래


언제나 유성을 잡는 사람. 마음은 울고 있는 남자. 너의 심장은 내 것이다' 황무지 마녀가 하울에게 보낸 메시지이다. 단순한 경고라기엔 그 내용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마음'은 본래 의미 그대로의 마음, 곧 '진심'이다불꽃 마귀 캘시퍼의 본체는 별이고 별은 스스로 빛나며 상승하는 힘이다. 별에게 붙들린 마음은 도무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른다. 한없이 날아오르며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초월하거나 도외시한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울이 젊은 나이에 놀라운 마법적 성취를 이룬 것은 캘시퍼와의 계약 탓도 있지만 자기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에 굉장한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괴로움으로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포기를 못한다. 이것이 별을 쫓는 사람의 딜레마이다. 이상에는 한계가 없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한계가 찾아온다. 게다가 현실을 아주 모른척하며 살아갈 수도 없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범속하고 정형화된 틀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나치게 별에 붙들린 마음은 이러한 내재적 갈등이 심각하고, 이상과 현실 중 어느 한쪽을 버리는 과정을 겪으며 자칫 마음을 다칠 수도 있다. 때문에  언제나 유성 잡지(지만) '마음 울고 있는...'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미가 더해진다. 마법사 하울에게는 심장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을 다른 무언가에 종속시킨 채 살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렸을 적 계약하면서 캘시퍼에게 주어버렸으니 그는 어떤 의미에서 ‘심장 없는 인간’, 즉  ‘마음을 상실한 인간’이다. (마음이 심장에 깃들어있다는 생각은 동서양이 일치한다.) 심장의 부재는 하울과 보통 사람을 구별 지으면서 그의 초인적인-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그는 내 안의 신성한 불꽃을, 가장 본질적인 것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본연의 마음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하울은 그래서 우는 법도 잊어버린다. “(괴물로 변한 장병들을 가리키며) 나중에 울게 되겠군. 이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거든.(캘시퍼曰)  “우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지.(하울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울고 있는 마음인 남자. 황무지 마녀가 하울의 비밀-심장을 매개로 불꽃 마귀 캘시퍼와 계약함-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다.



 메시지의 주체는 욕망이다. 황무지 마녀는 바로 그런 마음을 원한다. 무언가에 송두리째 바친 마음, 마치 박탈당한 것 마냥 허전해하는 그 마음을 움켜쥐고 싶어 한다. 하울 자신이 내 안에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묘연한 마음이다. 때문에 더욱 소유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다. 본인조차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을 원하는 타인의 욕망이란 얼마나 노골적인 것인가. 황무지 마녀는 성적으로 충만한 여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성적으로 갈구한다. 그녀가 원하는 하울의 심장은 일차적으로 싱싱한 젊음이며 남성성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성적으로 굴복시키면 상대의 마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분명 황무지 마녀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이다. 무척 똑똑할 뿐 아니라 시간을 제 편으로 삼고 있는 여자이다.(실제 나이와 다르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점) 그녀는 하울의 딜레마를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그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경고한다.




 



- 하울과 무서운 누나들! 


 그런데 하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인은 황무지 마녀뿐만이 아니다. 왕궁의 수석 마법사인 설리만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극 중의 모든 인물들보다도 하울과의 인연이 오래되었다. 설리만은 하울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옛 스승이다. 그녀는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마법에 관한 한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유능하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는 상황에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는 하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하다. 하울 대신 왕궁으로 찾아온 소피를 보며 하울은 위험한 인물이고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변장하고 뒤늦게 찾아온 하울을 태연하게 맞이하고선, 소피가 보도록 하울의 괴물 같은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한다. 설리만이 소피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서 한참 동안 자료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썰을 발견 했다. 설리만이 모계 사회의 엄격하고 권위적인 어머니 상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하울은 이런 어머니에게 깊은 외경과 반항심을 품고 있는 미성숙한 소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엿한 남자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한때는 어머니가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결코 여자가 될 수 없다. 하울은 영웅이 전형적인 과정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부를 찾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하울의 신부란 여주인공인 소피이다. 저주에 걸려 할머니로 변해 있지만, 본모습은 그와 비슷한 또래의 순결한 처녀이다. 반면 황무지의 마녀는 위험한 성적 매력을 지닌 창녀의 전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황무지 마녀와 하울의 관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시기는 아마 스승 설리만(=어머니)에게서 막 독립하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황무지 마녀에 대한 매력적인 소문을 듣고 먼저 접근한 사람이 하울이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달아난 사람 역시 하울이었다. 대체 무엇이 두려웠을까. 아마 자신의 남성성을 압도하는 치명적인 여성성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자칫 먹혀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도망친 것이다. 그 후에도 하울은 황무지 마녀를 무서워하며 자신의 방에 마법이 깃든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갖다 놓는다. 그토록 위협적이었던 황무지 마녀는 강력한 어머니 설리만에 의해 힘을 잃고 쭈그렁 할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아들의 짝으로 원하는 것은 방탕한 창녀가 아니라 순결한 처녀이다. 설리만이 소피에게 보이는 태도는 특별히 적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호의에 가깝지만 황무지 마녀에게만큼은 단호하다. 마녀가 가진 힘, 치명적인 성적 매력은 하울이 아니라 강력한 모성을 대변하는 설리만에 의해 제거당한다. 설리만은 또한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하울과 소피를 쫒지만 끝까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개를 감시로 붙이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영향력을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욕구이다. 며느리는 들이겠지만 아들의 세계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설리만은 애니메이션이 끝날 즈음 다시 한번 등장하며 모성의 건재함을 과시한다.






  하울과 소피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소피는 할머니가 되고 나서 오히려 대담해진다. 자포자기와 비슷한 심정이지만, 예전과 달리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게 되면서 내면의 자아가 부각되는 모습이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한다. 왕궁에서 설리만에게 대서는 모습이나 괴물로 변해버린 하울을 보면서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에는 강인한 내면이 서려있다. 게다가 그녀는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는 이중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낮에는 요리하고 장을 보고 청소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해내고 밤에는 싱그러운 열여덟 살 처녀로 변신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성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아직 성적으로 미성숙한 하울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더욱이 하울에게 부재한 다정하고 가정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도 요구된다. 할머니 소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하울의 이중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소피의 저주가 풀리면서 할머니의 모습은 사라지지만 두 사람은 더욱 공고하게 결합한다. 그들은 힘을 잃은 황무지 노파와 늙은 개, 어린아이 마이클까지 받아들이며 독특하지만 누가 봐도 손색이 없는 가족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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