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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Apr 05. 2016

[그림] 아폴론과 다프네 _워터하우스

- 공포와 미친 사랑의 경주



-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술래잡기


  여기에 쫒는 남자와 쫓기는 여자가 있다. 쫒는 남자의 동기가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해서 이 두 사람의 추격전을 낭만적인 술래잡기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쫓기는 여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맨 정신으로 감내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서 꿈에서 깨어나서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렸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녀를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는 낯선 남자 역시 허상이 아니다.


John William Waterhouse _ 아폴론과 다프네

 



- 다프네의 공포,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기에?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에로스가 다프네에게 공포의 화살을 쏘았다고 했는데 그럼 다프네의 눈에 아폴론이 어떻게 비쳤을까. 말 그대로 그녀가 알고 있는 공포 그 자체로 보였던 걸까. 요정 다프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을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해 잠시 상상을 해보자. 동료 친구들과 리라를 타면서 놀다가 야생 동물의 습격을 받았을 수도 있고, 호기심에 인간들의 숲에 들어갔다가 쳐놓은 덫에 걸렸을 수도 있다. 독성이 깃든 약초를 모르고 먹었다가 된통 고생하거나 발을 잘못 디뎌 산비탈을 구를 수도 있다. 그렇다. 그녀가 겪을 수 있는 공포스러운 상황이란 이런 것들뿐이어서 오히려 '모험적인 낭만'을 운운해야 할지 모른다. 아마 그녀는 머리에 피가 흘러도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새로운 사냥감을 물색하기 위해 눈을 반짝일 것이다. 습격해오는 동물이 있다면 사냥하고 영역을 침범해 휴식을 방해하는 인간이 있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다프네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님프들은 신들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인간처럼 약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다프네가 아폴론에게 느낀 엄청난 공포는 경험과 상관없는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뜻밖의, 갑작스러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녀가 아폴론의 모습에서 어떤 끔찍한 면모를 발견했을 리는 없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아폴론은 올림푸스 공식 미남이다. 신들의 외모는 미적인 요소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물며 아폴론은 신들 중에서도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신이다. 아폴론의 정체를 모르더라도 아름다운 외모에 충분히 호감을 느낄 수 있다. 적어도 두려움을 느끼며 정신없이 달아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프네를 사로잡은 공포에 대한 실마리는 이것이다. 그녀의 성격에 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나친 결벽이다. 그녀는 평소 독신을 고집했고 저 결혼하지 않는 영원한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흠모하고 있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를 전복시키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에 대한 거부감이다. 어쩌면 자신을 원하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불안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다프네는 자신의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 이오스에게 매달리며 남자 없이 이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에로스는 그녀의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인 이 불가해한 거부감을 극도로 헤집어놓은 것이다.


 아폴론이 다프네의 앞에 나타나 다짜고짜 구애를 한 것은 결국 짚더미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자신을 원하는 낯선 남자가 눈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나자 다프네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공포가 눈을 뜬다. 애욕으로 몸이 달은 아폴론을 보면서 다프네는 처음으로 자신의 지독한 결벽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다프네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 아폴론의 실수, 에로스적인 것을 무시하다


 아폴론의 사정도 꽤나 복잡하다. 그는 본래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신이다. 냉철한 지성의 세계를 수호하는 아폴론에게 감정이란 언제든지 다스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보다 확고한 이성을, 무분별한 욕구보다 절제의 미덕을 사랑하는 그는 인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올림푸스의 신들조차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빛으로 대변되는 아름답고 질서 있는 모든 것들은 아폴론의 다스림 아래에 놓여있으니 그를 미워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랑의 신 에로스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서 새삼 아폴론의 높은 자부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다. 자부심은 정신건강에 이로운 것이지만 지나치면 타인으로부터 빈축을 산다. 사건은 간단하다. 점잖고 우아하지만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폴론은 어느 날 에로스의 화살을 무시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꼬꼬마 에로스는 그냥 웃은 다음 아폴론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의 신이 행하는 복수란 대개 한 사람의 마음에만 불을 지피는 것이다. 에로스는 자신의 방식을 약간 응용하여 아폴론에게는 눈 먼 애욕의 화살을, 다프네에게는 소름 끼치는 공포의 화살을 쏘았다. 애욕이라는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아폴론은 철저히 망가진다. 주신主神으로서의 자존심 따위는 버려두고 다프네를 향해 마음을 털어놓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직 적개심이다. 다프네는 정신없이 달아나고 아폴론은 그 뒤를 쫓는다. 싫다는 여자를 한사코 쫒아가는 이성과 절제의 신이란 얼마나 가련한가. 자업자득이라지만 망가져도 너무 망가졌다.




- 공포와 미친 사랑(L'Amour fou)의 경주. 마지막 승자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의외로 길게 이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힘이 훨씬 센 아폴론이 다프네를 금방 붙잡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다프네는 좀처럼 아폴론에게 잡히지 않고 언제나 저만치 앞서 나가며 단순한 추격전을 마라톤 경기만큼이나 지루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두 사람은 들과 숲과 강을 넘고 다시 강과 숲과 들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또 내달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다프네가 보통 인간 여자가 아니라 숲 속의 님프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를 한사코 붙잡고자 하는 사람의 집요함이 만만치 않다. 아폴론이 쫒으면 쫒을수록 다프네의 공포는 커져가고 이것이 그녀에게서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끌어낸다.



이것은 결국 ‘공포’와 ‘미친 사랑’의 아슬아슬한 경주이다. 아폴론이 혼자 발작하는 사랑의 전형이라면 다프네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두려움에 붙들린 케이스이다. 두려움은 멀리 달아나는 속성이 있고 사랑은 돌진하는 속성이 있으니 이 둘은 언제까지나 무의미한 경주를 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포의 날개를 달고 도망치던 다프네에게 한계가 찾아온다. 아폴론은 어느새 그녀를 거의 따라잡는다. 더 이상 도망칠 힘이 없는 다프네와 그녀의 공포심은 그만 자폐의 지경에 이른다. 강의 신인 아버지를 향한 간절한 외침과 함께 다프네는 그 자리에서 산 채로 나무로 화해버린다. 아폴론이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잎사귀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무껍질이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떨림이 있었다. 아폴론은 다프네가 변한 나무 월계수를 자신의 성수(聖樹)로 삼고 불사를 부여한다.




- 에로스가 보내는 경고


 백번 생각해도 아폴론을 승리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을 버리고 나무로 화해버린 다프네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자부심 강한 아폴론이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호메로스는 다프네 건으로 아폴론이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큰 상처를 입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맹목적인 사랑이 초래하는 결말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운명까지 비틀고 파괴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프네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를 단순히 가련한 희생자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에로스의 복수심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폴론과 다프네가 똑같이 경시했던 '정념' 즉 에로스적인 감정은 인간의 기본 정서 중 하나이다. 그것은 언제나 왕성하게 움직이고 가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에로스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충동적일 뿐 아니라 항상 다른 무언가와 결합을 추구한다. 올림푸스의 신들조차 이 에로스의 힘을 어쩌지 못하며 일부 신들은 그것이 약속하는 쾌락과 고뇌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긴다. 사실상 온 세상이 잔인한 꼬마 신의 권능 아래에서 살아가고 또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 힘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혹은 완전히 분리되어 살기를 바라는 모습을 에로스가 곱게 보았을 리 없다. 결국 아폴론과 다프네는 에로스의 비위를 거스른 죄 아닌 죄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월계수가 되어버린 다프네는 아폴론에 의해 불멸의 생을 이어나간다. ‘언제까지나 지금 이대로’를 소망했던 그녀의 바람은 비록 님프 시절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사계절 늘 푸른 월계수가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아폴론은 이 사건으로 크게 깨달은 바(?) 이후에는 가끔씩 자신의 활을 내려놓고 애욕에 휘말리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무시무시한 에로스 신 또한 자기 화살을 가지고 놀다가 가슴을 찔리는 바람에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이처럼 에로스적인 것이란 어느 누구도 자신만만하게 다룰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차라리 알고도 속아 넘어가주는 편이 살아가기에 편할 것 같다.





* 워터하우스가 그린 그리스 신화 관련 그림은 상상을 자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 인간의 생살이(?) 순식간에 나무로 변해버리는 모습을 영화 같은 장치를 통해서 보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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