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3주 전 내가 본다면 미쳤다 하겠다.
과제를 위해 이것저것 되짚어 보며 키를 더듬어보는데 활자들 하나하나가 나의 손가락을 따라 모니터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문득 귀엽다. 나의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세상의 어느 일부분에 추가로 자취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 아- 나는 기술복제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꾀나 멋스럽게 느껴진다. 이 작업물이 신미롭거나 종교적인 함의는 없을 수 있겠지만 이것 역시 예술과 같은 뭐 그런 게 아닐까? 아마도 3주 전 내가 본다면 미쳤다 하겠다.
미국의 과거 정부가 지하시설에 인간복제의 실험을 하였다는 것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그 바로 전에는 '사바하'라는 영화를 봤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였구나 단순화할 수도 있겠고, 진짜 신은 존재할까? 신이라는 놈은 도대체 뭐하느라 나를 이지경에...라는 물음을 남길 수도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지난 월요일에는 2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마치며 연인과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 그토록 다투고, 상처 주고, 가슴 아팠던 2년, 우리는 진짜 사랑이었을까?라는 생각이 그 순간 불현듯 들었던 것은 비밀이다. 그리고 퇴근 후 강의, 추가로 읽을거리까지. 근래 내게 끊임없이 던져졌던 질문은 '진짜'였던 것 같다. 그놈의 진짜가 뭐길래 진짜.
종교적 대상의 경외적 가치와 역사적 함의를 떠나,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의 핵전쟁보다 치열함이 깊은 나름의 애정전선 문제를 떠나 맥루한과 벤야민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아로새기며 촉각이며 아우라며 내 나름의 담론을 내뱉던 시간을 떠나서 나는 지금 내 옆에 진짜로 놓인 차가운 플랫화이트 한잔과 카페서 흘러나오는 그 누군가의 멜로디가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참으로 감사하다. 진짜로.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넘고 또 넘어 우리가 도착한 지금의 은하계의 종족들은 문화와 콘텐츠의 넘치고 넘치는 범람 속에서 나름의 사유와 조금의 잉여, 저마다의 이유 있는 취사선택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기대도 지금 이 시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극단적인 혁신, 변혁에 대한 임계치도 역대급,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밤잠을 못 이루는 이도 없겠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러라지 뭐 하고 넘어가는 게 이롭지 않겠는가.
예전에야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보던 때에 시뮬라르크며 시뮬라시옹이며 단어 하나하나의 파생적 연구 내용들을 찾아보았다. 그 당시는 진리에 대한 탐구였을까? 나는 이제와 단순한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만큼 만사 회의적이 되었다고 할까. 감상주의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빨깧거나 파랗던 알약을 손에 쥐고 있던 모피어스 역의 흑인 배우의 모습보다 슬로 모션으로 총알을 피하던 키아 누리 부스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반증이 될 수 있으려나. 당시에 싸이월드를 열심히 하였다면 남들이 다 볼 수 있게 다이어리에 열심히 시뮬라시옹을 복사해 붙여 넣었을 텐데...인스타그램을 하는 지금은 매트릭스 영화표 사진을 찍어 '별 네 개, 그리고 이모티콘 골라 두어 개, 그리고 해시태그로 #내일 출근 실화? 이렇게 업로드할 것 같다. 감독의 대단히 깊은 뜻을 구태여 인스타그램에 적어 올릴 만큼 진지할 필요를 못 느끼다고 할까. 알 사람을 알 것이며 모를 사람에게 아는 척을 해야 하는 역할이 왜 나여야 하겠는가.
통신사들의 5G 광고에서 [초능력]이라는 광고 카피가 요즘 인상적이다. 지금도 사실 판타지의 영역이 맞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과거에 비해 엄청난 능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일정의 요금제를 감당할 수 있다면 그리고 배터리를 유지할 아주 작은 성실함만 잊지 않는다면.
초연결 시대의 대두에서 진짜의 의미를 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진짜가 아니라면 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가짜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 시대에 무엇일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게 구분해낼 능력이야 말로 초능력이 아닐까?
이전 세대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 기술을 우리는 가졌다. 제3 국, 소외계층을 논외로 하고 대중이라 일컬을 수 있는 우리는 최소한 그렇다. 기술을 통한 이 능력의 대중화. 나는 이 시대의 노고에 박수를 쳐왔다. 내일이 기대되는 가치로운 발전으로서. 우리는 더 진화하고 있다고만 생각해왔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발전이 같은 방향으로 뻗고 있다고만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해왔다.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의 초능력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영웅의 숙명 같은 미션들은 우리에게 없다고 여겼다. 초능력을 통해 상실되는 능력이야 전화번호를 더 이상 암기하지 못한다거나 시력이 조금 떨어진다고나 청력이 좀 둔해진다는 정도로만 딱 거기까지만.
기술의 발전,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진보, 우리가 가진 초능력의 시초를 살펴봤을 때, 그 시작을 활자 기술의 발명부터 돌이 켜봤을 때, 그 어떤 감각의 누락과 일부 커뮤니케이션 기능의 단순화 구조화 등을 처음으로 생각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선했다. 아, 기술의 발전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구도 충분히 가능했겠구나 싶은 생각으로. 그렇다면 그 누락된 커뮤니케이션 속의 일부 메시지는 어떤 형태 일까? 머나먼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누락되어온 그 일부가 지금의 우리의 삶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을까? 등등의 생각이 미치고 나서 문득, 다시 회의적이었다. 공상과학소설, 영화 속에서의 로봇들의 지구 정복류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들이 떠올랐던 이유에서였다. 과학의, 기술의 발전으로 학문 영역에서 위협을 느끼기 된 인문사회 쪽의 기술문명 발달적 흐름에 달걀을 던지는 필연적 스토리텔링이었다는 해석이 떠올랐던 이유로.
돌아와 구텐베르크 은하 계속 문제제기 역시, 활자와 인쇄기술의 발전의 단계에서 일부 문학과 문화를 독점하여 향유하던 일부 특권층을 대변할 수 있는 볼맨 소리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우주가 평온해졌다. 누락된 무언가, 상실된 그 어떤 것에 대한 존재유뮤를 떠나 그 영향력과 의미가 크지 않을 것 같다는 합리화를 떠나 나의 우주가 다시 질서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누락되어왔고 상실되고 있는 일부가 아니더라도 '진짜'라는 명제의 여지는 남아있다. 나는 진짜인가? 내 옆에 이제는 비워져 있는 커피잔의 플랫화이트는 진짜였나? 아직 내 우주에 답은 내려져 있지 않다. 내가 스마트폰으로 커피잔을 찍어서 일부 꾸밈 작업을 통해 인스타그램에 올려진 이미지를 작품으로 의미부여를 할 경우 그 이미지의 원본은 어디에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탄생과 동시에 수십수백 나아가 수십억 명의 사용자들이 동시에 소비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구조에서 원본은 하나일 수 있는 것인가? 내 스마트폰에서 투영되는 인스타그램 화면이 원작인 것인가? 오늘 내가 바라본 커피잔 이미지와 몇 년 뒤 시간이 흘러 그 이미지와 캡션을 다시 확인했을 때 그 해석의 차이가 없을 수 있을까? (수년 전 매트릭스를 보았을 때 나와 지금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고 여기는 관점에서도?) 그 코어의 메시지만 보존되도록 그럼에도 계속적인 기록을 해나가는 것으로 충분한 의미를 다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은 수용자의 해석과 반응의 단계에서 메시지의 의미가 갈릴 수 있는 것일 텐데 나라는 사람부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해석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동시대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같은 의미로서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찍은 커피잔의 이미지가 누구에게는 졸작, 누구에게는 인생의 역작, 누구에게는 쓰레기 누구에게는 작품이겠다. 뒤샹의 샘처럼. 그 의미부여가 가지는 복잡한 상징적인 메시지가, 포장이 결국 우리를 둘러싼 모든 브랜드의, 상품의, 예술작품들의, 가치로 불리는 것들의 실체. 그것이 이제 것 인간이 쌓아온 인간의 업적의 단면이겠다. 그럼 모두가 진짜가 아닐까?
코카콜라 리미티드 에디션의 유리병이 놓여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먼지를 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정의 시간 동안은 나름 의미가 있는 이 시대의 작품이었다. 코카콜라가 그렇다. 코카콜라라는 브랜드가 주는 happiness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부자에게도 거지에게도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코카콜라가 신체 감각적으로 줄 수 있는 유희는 동일하다. 그 접근성에서도 큰 가치 차이를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이 활자 인쇄기술의 발전이 이 문명에게 가져온 대중화 역할과 같은 흐름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코카콜라 리미티드 에디션의 병을 내 방에 굳이 가져다 두었던 이유는 그 가치를 내 지근거리에 두고 싶어서였다고 당시에는 포장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 누구가 아우라를 봤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어떤 작품들 그 흔히 진짜라고 가장 쉽게 규정할 수 있을 것들보다. 내방의 유리병 하나가 그때는 내게 진짜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진짜는 불가항력적이고 영원 무결하게 진짜일 수 있는 것만 진짜인 것인가? 모나리자 그림 또한 어느 시대에 살았던 지금은 먼지가 되어 없는 여인 모나리자를 모사했을 뿐이거나 복제하려 했던 시도의 산물일 뿐 아닌까? 그게 진짜인가?
끊임없이 물음표만 던졌다. 모자이크식으로 작게 작게 흩뿌려 써 내려갔다. 숙제로 주어졌던 읽을거리들에서 처럼 나름의 어떠한 결론을 위한 경주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진짜였다. 그것이 내가 3주간 진짜에 대한 물음에 대한 물음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