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의 관점으로 살펴본 소셜미디어 : SNS

- 디지털 시대의 소셜미디어의 6가지 분리적 성격을 중심으로

by 민또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내기.


‘Connet’가 아닌 ‘Separate’

이번에는 ‘Connet’가 아닌 ‘Separate’라는 어젠다 세팅으로 접근해봤다. 다른 글들과, 나의 글을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결국 수업시간, 앞자리 앉은 사람과, 옆자리 앉은 사람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내 보고자 하는 심사로. 그러면 그들과 분리되어 보일 수 있을까? 왜 이토록 남들과 조금이라도 달라 보일 수 있는 포인트를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는지, 이는 디지털 복제 시대에 처해진 나라는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이겠다. ‘나는 다 똑같은 복제품이 아니야!’라고 외치듯이. 그래 봐야 어차피 거의 똑같거나, 아주 비슷한 글을 어디선가 발견할 수 있겠지만.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할 생각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유튜브 개인채널을 시작하는 것은 ‘too much’라고 생각했다. 하고 있는 소셜미디어가 몇 개인데 뭣하러 또 하나를 늘리나 싶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하고 있는 소셜미디어가 동시다발적으로 아주 많았던 적은 없다. 싸이월드부터라고 한다면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 브런치도 그 범주에 들까? 순차적으로 하나를 시작하면, 하나를 접었다. 하나와 새롭게 연결되면 하나와 영영 분리되는 수순이었다. 페이스북을 하면서 싸이월드를 접었다.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페이스북을 접었다. 분리되었다.


페이스북... 안녕...


몇 년 전만 해도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를 누구보다 활발히 채워나갔던 내가 그것의 사촌동생뻘인 인스타그램이라는 놈과 요 몇 년 틈만 나면 근황을 나눴다. 그사이 페이스북은 너무 진부해졌다랄까? 급기야 계정을 삭제하기까지 했다. 운영하던 페이스북의 페이지도 200만 원을 받고 넘겨버렸던지라 그 실효를 다했다고 판단했었고, 주변의 지인들 역시 페이스북에 더 이상 개인적인 글들을 올리지 않는 걸 보니 페이스북과의 안녕이 더 ‘힙’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어떤 날 나는 페이스북을 떠났다. 자연스레 인스타그램에 더 많은 근황을 올리고 1만 명의 팔로워 가까이까지 ‘달성’하는 것을 앞둔 즈음에 한 달에 두 차례 정도는 기업으로부터 협찬 문의가 들어와 제품 광고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가끔 인스타그램도 비활성화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체에 환멸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랄까? 사람 기분이 참 오락가락하는데 이유가 딱히 필요가 없었다. 계정을 삭제하고, 때로는 비활성화하고 그렇게 소셜미디어로부터도 가끔은 분리를 해낸다. 무엇을? 그러게 말이다.



[현실세계와 분리]
유튜브 ‘준비’를 하면서 내방을 스튜디오화 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2가지 종류의 작업을 했다. 하나는 연결. 그것은 장치적으로 조명, 녹음 등을 위해 장비를 구비하는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편집, 효과 넣기를 익히는 일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분리. 유튜브 채널을 위해 어쩌면 연결의 작업보다 분리에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상에 배경으로 걸리고, 주변부에 결릴만한 내방의 소품들, 그리고 개인물품들을 정리하거나 완전히 이별하는 일들이 꽤 많았다. 초등학교 때의 사진, 고등학교 때의 낙서, 군 시절의 편지, 취준생 시절의 서류들 모두 안녕. 인터넷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나는 현실세계에서 내가 아날로그적으로 쌓아왔던 것들과 분리되고 이별하는 중이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있어 내가 오히려 [현실세계와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일기장도 디지털화하고 버렸다. 편지들도 사진을 찍어 드라이브에 넣고 버렸다. 책장에 켜켜이 먼지 묵은 책들 중에도 중고서점에 넘기거나 활자의 가치와 무관하게 종이로써 폐지로 분리수거함에 담기는 운명을 맞는 것들이 있었다. 하드카피의 책자체가 사물 따위가 독립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랄까. 나 스스로가 보다 독립성과 지속성을 갖기 위해 정리해냈다. 책들을 정리하는데 어떤 죄책감이 사라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물며 일기며 편지들까지 쓰레기와 뒤섞이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다시 구입할 수 있고 디지털로 열람할 수 있는 책의 가치가 크지는 않았다. 물리적 레이어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작업은 미니멀리즘 적인 생활로의 전향에도 가까워 뿌듯하기 까지 했다. 기술로서 지적 산물이 재탄생되고 재생산되어 내 앞에 다시 놓이는 것이 나의 큰 관여와 노력 없이 선택적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것은 현실 속에서는 얼마든지 사라져 버려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유튜브 채널의 시작을 고민하는 과정과 연결과 분리의 관점에서 이 글을 쓰는 과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내가 굳이 유튜브를 해야 하는 이유, 하려는 이유, 하게 된 이유에 대한 명분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언제고 나의 유튜브 채널의 하나의 콘텐츠로 재매개화 될 것이라 확신한다. 현실세계와의 분리, 아마추어들과의 분리, 非메인스트림과의 분리, 진지한 관계들과의 분리, 커리어가 아닌 직장과의 분리, 결국 나 자신과의 분리까지. 연결에 반한 분리의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이 글의 소재들도 정리되었고, 표현 공간으로서의 소셜미디어,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분리 행태에 대한 나의 리스트업까지 유튜브 콘텐츠의 스크립트도 동시에 완성되었다. 텍스트 형태의 본 글과, 마찬가지로 텍스트 형태의 스크립트지만 유튜브라는 플랫폼에 올려질 영상으로 재탄생될, 재매개 될 콘텐츠의 초안이 연계성을 띄면서도 각각의 공간의 차원에서 축적되었다. 편리하게도.

[아마추어와의 분리]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사이에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나에게 있었다. 영상으로의 내 자아의 표현에 앞서 ‘긴 글’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에서 자기표현 확장을, 어쩌면 자기표현의 완성을 이상화하여 생각했었다. 인스타그램 특유의 지극히 가볍고 캐주얼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그리고 의미 없는 사회(교)적 성격에 대한 허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긴 글을 통한 그들과의 분리, 선긋기를 노렸었다. 정보 전파적인 성격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스낵 컬처라고 불리는 캐주얼한 콘텐츠들과 대비되는 나만의 권력을 축적하고자 하는 야망으로 브런치를 했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지금도 노력 중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10대들과 20대들의 놀이터에서 30줄의 아저씨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더 추잡스럽기 전에 나에게 맞는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였던 것이 브런치의 시작의 명분이었다. 브런치 말고도 미디엄도 있다. 그 외에 다양한 칼럼 형태의 전문적 글쓰기가 가능한 플랫폼들이 몇 년 사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청춘의 팔팔한 글쓰기와 ‘안’ 청춘의 뽐내기류 전문적 글쓰기의 서로 간 떼어놓기 작업. 내 마음대로 [아마추어와의 분리]라 해도 되지 않을까.

소셜미디어를 중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얕잡아 ‘관종’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요즘이다. 관심종자. 관심을 구걸하여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겠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행동을 일축하는 명명이고 그러한 환유일 수도 있고 표상이겠지만 그것이 나쁜가. 노출증, 관음증이라는 정신병리학적인 용어와 가장 잘 들어 맡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이 요즘 가장 대표적인 관종 양성 플랫폼이라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관심에 대한 갈급함이 정신병리현상으로까지 치부할 필요가 있을까. 개개인의 자기표현의 욕구에 대해서 그 현상으로만 설명하기보다는 왜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에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자기를 노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끌리는 데로, 인식의 확장의 장으로서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거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껏 최상의 자신을 스스로 끌어내어 박재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그 노력이 가상하다고 할법하지 않은가.


관종과 더불어 ‘인싸’ 그전에는 ‘힙스터’ ‘힙하다’라는 표현이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내가 선망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나의 스마트폰 화면에 노출해주는 ‘인싸’들이 방문하는 카페와 맛집, 숙박하는 호텔, 구입하는 옷, 아이템들을 나도 한번 차용하고, 복제하고, 모방해보면서 현실에서의 [非쥬류와의 분리]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노력이 현대에서는 일종의 미디어적 계급화를 이뤄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메인스트림과의 분리에 대한 불안을 그 촉매로 우리는 계속해서 주류에 편승하고자, 또한 끊임없이 비주류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그 갭을 견고히 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고 나는 분석한다. 분리해내지 않으면 분리당한다는 강제적 위기감으로 말이다. 집에 홀로 남겨두고 온 애완견이 분리불안으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양식에는 이제 주류문화에서 이탈, 분리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증으로 이상행동들을 보이고 있는지 모른다. 같은 자리를 이유 없이 맴돌고 여기저기 변뇨를 싸지르며 수습 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애완견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과거, 사물의 힘으로 대변되던 권력이 여기 소셜미디어에서는 숫자적인,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수치로서 다시 말해 기호로서 나타나게 된다. 권력관계 및 영향력은 팔로워 수와 좋아요 수 댓글 수로서 표현된다. 프로필 상단에 적히는 팔로워 수가 그 사람과 관계 맺는 사람의 숫자요, 그 사람의 영향력 휘하에 있는 추종 부대의 규모가 된다. 얼마든지 합성이 가능하고 조작이 가능하며 사진 외 증명, 증빙이 어려운 것들을 통해 우리는 주류-권력자-인플루언서를 암암리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더 이상 실체적 사물의 힘으로서 권력을 발현하는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인증샷’은 필요하다. 아니 이제 그거면 충분하다. ‘인증샷’


[진지한 관계로부터 분리]
친인척과의 관계보다도 팔로우를 주고받는 랜선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모님의 어색한 칭찬보다 소셜미디어의 인플루언서가 내게 해주는 좋아요와 댓글에 나는 더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른다. 진지한 삶의 얘기를 나눌필요야 없고 서로의 최상의 컨디션에서의 글, 사진, 영상으로 서로를 대한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해할 필요도 없고 집안의 사정이야 알바 아니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빵집에서는 무엇을 찍어 올려야 좋아요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어떤 구도로 사진을 찍어야 내 얼굴이 더 생기 있고 활기차 보이게 나오는지에 대한 아니면 더 신비적이고 사연 있어 보이게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의 얕은 공유면 된다. 새벽까지 술을 들이붓다 사실은 말이야로 운을 띄우는 비극적 내러티브를 감당하는 것보다 오늘도 흥, 내일도 흥 가볍게, 더 캐주얼하게 실오라기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그래서 언제고 끊어내도 서로가 상처 없는 관계가 이제 더 만연하다. 적어도 소셜미디어 소사이어티 안에서는 그러는 편이 더 낫다. 이것은 [진지한 관계로부터 분리]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커리어가 아닌 직장과의 분리]
매일 출근하는 직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의 깊은 사유에 대해서는 공유하는 것이 민폐일 지경이다. 같이 이따금 점심을 함께하는 런치메이트일 뿐, 흡연장에서 어색하지 않기 위한 정도의 농담 메이트일 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눈 둘 곳을 몰라 헤매지 않을 정도로 대화 몇 줄 나누는 정도의 근황 메이트일 뿐 진지한 관계로의 발전은 서로가 피곤하다. 직장에서의 관계뿐만 아니라 직장 자체와도 우리는 있는 힘 것 분리해내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에 걸맞은 소셜미디어는 링크드인이 대표적이겠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의 속성이 있지만 링크드인의 상세한 프로필과 경력란을 가득 채울수록 수많은 헤드헌터와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동시에 회사를 회사로서 객관화하고 언제든 노동시장에 나올 수 있는 상품임을 스스로 각인하는 정리 및 분리 작업이 된다. 이를테면 [커리어가 아닌 직장과의 분리], 커리어에 대한 나의 객관화 작업과 미래적인 준비 작업의 공과 내 안의 숙제에서 인터넷상으로 던저버린다. 보다 서구문화적인 접근을 우리는 링크드인이나 여타 헤드헌터와 링키지 될 수 있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현한다. 평생직장으로서 입사동기와의, 직장상사와의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라는 미명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주머니 속 사표 대신 스마트폰 안에 소셜미디어를 품고 달랜다.


미디어, 소셜미디어가 세상과의 연결의 기능, 특히나 자기표현의 공간으로서의 역할과 기술적, 사회 조건적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채널을 통해서 충분히 살펴봐왔다. 큰 틀에서는 결국 다른 이야기가 아닐 수는 있으나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관점에서 같은 현상을 바라보고 정리해보고 싶었다. 세상과의 초월적인 연결이 너무도 당연한 이 시대에서는 이제 연결이 더 이상 화두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관점의 트위스트를 주고자 하였고 다음을 나열하는 식으로 글쓰기를 해봤다.


- 현실세계와 분리

- 아마추어와의 분리

- 非쥬류와의 분리

- 진지한 관계로부터 분리

- 직장과의 분리

[결국 나 자신과의 분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네트워크를 이루게 되는 기능으로서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상호 연계된 플랫폼 간의 재매개 과정을 직접 현시대인으로서 사용, 경험하며 소셜미디어의 분리적 특성에 대해서 서론 한다는 것이 나의 자아표현에 있어서 일정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팔로워 1, 구독자 1과 같이 숫자 1로서 존재하는 기호로서 나의 의미가 끝이 아니라. 미디어 공간으로 억지로 밀어 넣고 소모되어지는 알파벳이며 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내가 일부 의도한 방향으로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도구로서 소셜미디어를 보다 주체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관점의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논의였다고 판단한다. 소셜미디어의 기능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기 위한 일부 부품으로써의 개인이 아닌 사용자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분리의 과정 [결국 나 자신과의 분리]를 통한 객관화가 이 시대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관점이 아닐까 고민해본다.

나를 표현하여 세상과 연결 짓는 동시에 복잡계로 얽혀있는 무형의 내적 실마리들을 세상 밖으로 분리해 내는 일련의 행동. 내면화된 글쓰기 방식을 외적으로 구현해내고 내 안의 모호하게 자리한 지식과 경험 알고리즘의 텍스트적 기술로 끄집어내는 작업으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글쓰기는 그렇기 땜누에 불안하다. 복잡하다. 그럼에도 제한된 조건 안에서 최대한 더 단순하게 보다 미니멀하게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수제비 반죽을 떼어내는 것보다 많은 공을 들여서. 반죽을 떨어내고 손에 묻은 밀가루들을 떨어내듯. 이제는 저장을 누르고 피디에프 변환을 하고 업로드를 하면 나와 이 텍스트들은 완전히 뗴어져 분리케 되겠다. 야호 결국 오늘도 분리해내었다.

분리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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