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지금 누군가 저에게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갔던 곳이 어디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런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당장 어디로 가고 싶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런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유럽 여행의 시작과 끝이 런던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런던의 명물 빨간색 2층 버스와 너무 비싸서 한 번밖에 타보지 못한 런던의 블랙캡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좌) 런던의 명물 빨간 2층 버스와 (우) 비싸서 한 번밖에 못 타본 블랙캡
어떤 장소에 대한 주관적 선호를 장소애(topophilia)라고 합니다. 제가 런던을 좋아하는 이유가 런던이 뉴욕보다 더 잘 사는 곳이거나 날씨가 더 좋아서는 절대 아니겠죠. 아무튼 저는 런던을 사랑합니다. 런던이 배경인 영화는 빠짐없이 보고, 유럽축구에서도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즐겨 봅니다. 맛없는 영국 음식의 대표적 메뉴인 피시앤칩스도 좋아합니다. 다른 나라 여행 중에도 영국인을 만나면 그 강렬한 영국 억양에 빠져들곤 합니다.
런던 하면 빅벤을 또 빼놓을 수는 없지!
런던은 지금까지 총 여덟 번 여행을 했는데요. 런던에 매번 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 런던 아이와 빅벤을 봤을 때는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지만 이제는 템스강을 여유롭게 걸으며 그 모습을 마음에 담습니다. 뒷골목의 작은 펍에 들어가 축구경기에 열광하는 훌리건들 사이에서 같이 환호하며 경기를 봅니다. 저는 런던 템스강의 타워브리지를 파리의 에펠탑, 로마의 콜로세움, 뉴욕 자유의 여신상보다 훨씬 좋아합니다. 이쯤 되면 저는 정말 런던을 좋아하다 못해 편애하는 것 같습니다.
템즈강에서 배를 타고 보는 타워 브리지도 이색적입니다.
2. 런던에 볼 게 없다고?
그럼 또 누군가는 저에게 물을 것입니다. "런던에 볼게 뭐가 있냐?"라고 말이죠.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입니다. 런던의 인구는 도심인구 약 900만 명, 광역권까지 포함하면 약 1500만 명이고, 뉴욕, 도쿄와 함께 세계 3대 도시로 손꼽힙니다. 런던에는 영국이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고, 그만큼 영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많습니다.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버킹엄 궁전과 정치의 중심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의 랜드마크 빅벤과 런던 아이,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타워 브리지까지 말이죠.
런던의 중심 피카디리 서커스
또한 런던에는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득합니다. 현대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테이트 모던과 사치 갤러리, 영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 박물관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해리 포터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해리포터 스튜디오 등 다양한 전시관이 있습니다. 특히 세계 최고의 작품들이 엄청난 규모로 전시되어 있는 대영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는 입장료가 무료라는 장점도 있습니다.
(좌) 대영 박물관, (우) 내셔널 갤러리
개인적으로 대영박물관보다는 내셔널갤러리를 더 좋아하는데요. 물론 대영박물관이 규모와 다양함에 압도하기는 하지만 전시품들을 보면 영국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여러 나라의 문화를 약탈하고, 그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전시해 두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내셔널갤러리는 아늑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미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도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밖에 생소하지만 다채로운 미술품들을 하나씩 천천히 걸으면서 관람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3. 런던 하면 뮤지컬이지!
런던 하면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뮤지컬이죠! 우선 ‘메이드 인 런던’ 오리지널 뮤지컬이 참 많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부터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끈 '레 미제라블', 아바 노래로 뮤지컬 전체를 꾸민 '맘마미아', 그 외에도 '캣츠', '미스 사이공', '에비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수없이 많은 유명한 뮤지컬 작품이 런던에서 탄생했습니다. 뮤지컬의 매력에 흠뻑 빠진 후 반드시 뮤지컬의 본고장 런던에 가서 뮤지컬을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뮤지컬 ‘빌리 엘리엇’을 공연하는 빅토리아역이었습니다.
런던에서 처음 봤던 뮤지컬 빌리 엘리엇
그로부터 2년 후 또다시 런던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런던을 온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생일을 맞아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기 위해서죠. 영화로는 이미 여러 번 봤지만 오리지널 런던 캐스팅으로 보고 싶었거든요. 처음 런던에서 뮤지컬을 볼 때는 2층의 비 좁은 구석자리에 앉았었지만, 이번엔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니까 마음먹고 주인공 장발장의 표정이 보일 정도로 무대와 가까운 가장 비싼 좌석을 예매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자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첫 곡 ‘Look down’부터 시작된 전율은 1막이 끝나는 ‘One day more’에서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마지막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끝으로 순식간에 3시간이 흘렀고, 객석의 모두가 일어서서 무대를 향해 끊임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커튼콜이 여러 번 반복되며 귀가 먹먹해질 때까지 극장에는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웨스트 엔드에서 레 미제라블 오리지널 뮤지컬 공연을 봤습니다
4. 영국 음식이 맛없다고?
영국 음식은 세계적으로 맛없기로 손꼽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영국의 식재료 자체의 질이 좋기 때문에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청교도적 금욕주의로 인해 다채로운 요리법을 사치로 여기는 문화가 더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언급한 "영국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조리 전(Before cooking)으로 말이죠."란 말이 이를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영국 요리는 재료에 별다른 가공을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흰 살 생선 대구와 감자를 튀겨서 함께 먹는 피시 앤 칩스나 소고기를 구워서 잘라먹는 로스트비프가 대표적이죠.
(좌) 전형적인 영국식 아침, (우) 대표적인 영국 음식 피쉬 앤 칩스
하지만 최근 들어 영국 음식에 대한 악명이 점차 개선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국출신의 세계적인 요리사 고든 램지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국 요리가 발전하는 데는 영국 식민지들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등 영국의 식민지였던 다양한 나라의 음식 문화와 재료가 영국으로 유입됐으며, 이는 영국 요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현대 영국 요리에 커리 등 인도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가 많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중국의 광동 요리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서 영국 본토에서는 다양한 식재료가 유입되면서 새로운 조리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면서 유럽 여행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런던은 돈 많은 사업가들과 수많은 여행객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고, 고든 램지와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이 그들을 상대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런던은 미슐랭 레스토랑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이처럼 영국은 맛없는 요리로 악명이 높지만 런던에서는 의외로 맛있고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런던의 레스토랑
5. 세계 경제의 중심 런던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런던에는 ‘시티 오브 런던’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습니다. 시티 오브 런던은 지하철 Bank역을 중심으로 1 제곱마일(약 2.59㎢)의 좁은 구역입니다. 이곳을 런던의 금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곳이 영국은행, 런던증권거래소, 런던금속거래소 및 세계 5000여 개의 금융회사가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은행이 영어로 Bank인 이유도 이곳 Bank에서 처음 은행이 시작했기 때문이죠.
세계에서 처음으로 은행이 시작된 곳
Bank역을 나와 세계 경제의 중심이라고 하는 시티 오브 런던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규모가 오히려 이점이 되기도 합니다. 런던은 세계 어떤 도시보다 금융 기관의 집적도가 높은 곳입니다. 집적이란 동일한 업종의 기업이 한 군데 모여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적인 금융 거래의 대부분이 우리나라 여의도보다 좁은 곳에서 이뤄지는 것이죠. 금융 거래에 필요한 기업이나 기관이 도보 10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정을 이곳 시티 오브 런던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한 4차 산업혁명 시대라 하더라도 대규모 거래를 위해서는 얼굴을 직접 맞대어야 한다는 것이죠.
시티 오브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 30 세인트 메리 엑스
런던은 세계 경제의 거대한 두 축인 미국과 아시아 지역의 중간 시간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금융거래의 연속성 측면에서 큰 이점이 있고, 실제 외환거래시장 규모도 런던이 전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런던은 중동 및 아시아 신흥시장과도 시간적·지리적으로 접근이 매우 용이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런던은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하고 있어 외국 금융회사 종사자들의 영업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금융중심지로서 위상이 약해져 금융 권력을 잃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지만 런던이 지닌 이런 다양한 장점으로 인해 금융 중심지로서의 런던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1675년 찰스 2세가 천문항해술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하였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찾은 이유는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1884년 워싱턴국제회의에서 이 천문대를 기준으로 본초자오선으로 지정하여 경도의 원점으로 삼았습니다. 천문대 앞 바닥에는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을 표시하는 선이 그어져 있는데,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선 주변에는 세계 주요 도시들과의 시차가 표시되어 있어 이곳이 세계 평균시의 기준점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도 보여줍니다.
(좌) 세계의 중심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 자오선, (우) 동경 127도 서울
그리니치 천문대는 템즈강의 남쪽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런던 시가지를 조망하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해가 질 무렵 전망 포인트에서 런던을 바라봤습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과 카나리 와프가 보입니다. 저 멀리 런던을 상징하는 빅벤과 런던 아이도 보이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오가는 비행기들도 보입니다. 최근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의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한때는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음악, 뮤지컬, 축구 등 문화, 예술, 체육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영국이 저물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은 제가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당장 떠나고 싶은 곳입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에는 이유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