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든든한 방패, 강화도

[섬토리텔링] 인천광역시 강화군

by 지리는 강선생

대몽항쟁에서 신미양요까지 피로 지켜낸 섬


강화도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역사 시간에 배운 고인돌과 참성단, 혹은 서울 근교 드라이브 코스가 생각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강화도는 그런 평화로운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쟁의 섬이었습니다.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하구에 위치한 강화도는 수도를 굳건히 지키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1000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江)의 꽃(華)'이라는 이름처럼 강화도의 역사는 화려하거나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함께 만나는 강화도

그럼 왜 하필 강화도였을까요? 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는 동쪽으로 경기도 김포시, 북쪽으로 북한 개풍군과 마주하며 아주 좁은 해협인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닿을 듯 말 듯 이어져 있습니다. '손돌목'이라 불린 이 좁은 물길은 예로부터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했습니다. 이 물길은 곧바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으로 이어지는 입구였습니다. 즉, 바다를 통해 수도(개경 혹은 한양)로 들어가기 위해서 강화도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최종 관문이었던 셈이죠.


염하의 손돌목

이러한 지리적 운명 때문에 강화도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13세기 당시 고려는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몽골제국의 막강한 기마군단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고종은 수도인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피신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몽골군의 주력 부대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물살이 거센 강화해협은 그들에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죠. 그렇게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강화도는 고려의 임시 수도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 강화도는 결코 평화로운 도피처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육지에서는 몽골군에 의해 백성들이 무참히 학살당하고 있었고, 섬 안의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쥐어짜며 임시 궁궐을 짓고 사치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간절한 염원은 피어났습니다. 그 결실은 바로 현재 합천 해인사에 위치한 팔만대장경입니다. 몽골군의 압도적인 힘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무려 16년에 걸쳐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불경을 새기는 거대한 작업이 바로 이 강화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강화도는 39년간 몽골에 맞선 최후의 보루였던 동시에 지배층의 탐욕과 백상들의 염원이 뒤섞인 저항의 섬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조선 시대가 되었지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남하하면서 한강의 입구를 지키는 강화도의 군사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커다란 외침을 겪으면서 강화도는 각종 포대와 진(鎭), 보(堡)가 촘촘히 건설된 수도 서울을 지키는 거대한 요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 시절, 이 강화도는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몽골의 기마군단이 아닌 서양의 검은 철갑선이었습니다.


먼저 1866년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데,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입니다.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강화성을 함락하였고, 이곳에 보관 중이던 왕실의 서고 외규장각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왕실의 수많은 서적과 함께 조선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儀軌)가 프랑스에 의해 약탈당하고 맙니다. 이 의궤는 그로부터 145년이 지난 2011년이 돼서야 비로소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프랑스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고, 결국 프랑스 함대는 큰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인양요 이후 불과 5년 뒤인 1871년, 이번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옵니다. 미국은 몇 년 전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합니다. 미군은 세계 최강의 해병대와 최신식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화해협을 지키는 첫 번째 관문이었던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마침내 강화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였던 광성보로 향했습니다.

광성보와 용두돈대


이 광성보 전투는 강화도의 역사, 나아가 조선의 항쟁사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비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미군의 신식 무기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어재연의 부대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전투가 끝난 뒤 어재연 장군의 장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이 깃발 역시 136년 만인 2007년에야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죠. 신미양요는 결국 미국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지만, 강화도는 또 한 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온몸으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수도권의 가장 가까운 ‘섬 아닌 섬’이 되다


이처럼 강화도는 수백 년간 몽골의 기병과 프랑스와 미국의 최신 함대도 쉽게 넘보지 못했던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그 굳게 닫혔던 문은 한순간 너무나도 쉽게 열렸습니다. 바로 1970년 강화도와 김포를 잇는 최초의의 다리, 강화대교가 놓이면서부터입니다. 2002년에는 남쪽에 초지대교가 추가적으로 건설되면서 강화도와 수도권의 접근성은 비약적으로 좋아졌습니다. 한때는 거친 물살을 목숨 걸고 건너야 했던 그 염하를 이제는 누구나 차를 타고 불과 1~2분 만에 건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이 다리가 강화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초입부터 꽉 막힌 교통체증


보통 배를 타고 섬을 갈 때면 '이제 육지를 떠난다'는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차를 타고 강화도를 갈 때는 그런 이질감이 전혀 없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강화대교에 다다르고, 그저 한강 다리를 건너듯 눈 깜짝할 사이에 섬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리함으로 인해 강화도의 섬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은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강화도에는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휴양지'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됐죠. 또한 서울의 각종 기능을 담당하는 ‘위성도시’라는 새로운 정체성도 생겼습니다. 실제로 강화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제법 빼곡한 아파트 단지와 함께 가천대학교, 안양대학교, 인천대학교 등의 다양한 캠퍼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제 강화도는 섬이라기보다는 육지의 연장선처럼 느껴집니다.


다리가 놓인 후 강화도에는 새로운 풍경이 생겨났습니다. 주말 아침 강화도로 향하는 다리 입구는 어김없이 붉은색 정체 등이 길게 늘어섭니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잠시라도 섬의 여유를 느끼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서울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교통체증과 주차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과거 논밭이었던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대형 카페들이 경쟁하듯 들어서고 있습니다. 어떤 곳은 그리스 아테네 신전처럼, 어떤 곳은 뉴욕 자연사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강화도에 와서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강화도에 있는 멋진 카페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습니다. 강화도의 특산물인 순무김치나 인삼을 파는 가게보다 오히려 이런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예쁜 펜션에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빕니다. 전국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루지(Luge) 탑승장이 강화도의 새로운 상징이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강화도의 이색적인 카페
강화도 카페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그럼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처절했던 역사적 현장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서양의 압도적 군대와 맞서 싸웠던 초지진과 광성보, 그 피로 물든 격전지는 현재 잘 다듬어진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전쟁의 아픔을 느끼기보다는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인증샷 찍기에 바쁩니다. 수백 명의 조선군이 장렬하게 전사했던 광성보 안에서 아이들은 뛰어놀고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깁니다. 물론 이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그 공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150여 년 전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선조들의 모습과 지금의 이 평화로운 주말의 풍경의 대조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강화도가 단순히 평화로운 관광지 만은 아닙니다. 다리의 건설로 강화도가 수도권에 편입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화도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방 접경지역이기도 합니다. 강화도의 북쪽 끝 강화 평화전망대에 오르면 불과 2~3km 폭의 조강을 두고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집니다. 심지어 맑은 날에는 망원경이 없이도 맨눈으로 북한군과 주민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입니다. 이처럼 강과 바다를 따라 이어진 해안가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철책이 굳건하게 쳐져있습니다. ‘적 출몰 지역’이라는 다소 섬뜩한 경고판도 곳곳에 보입니다. 초지대교 부근의 강화도 남쪽은 완벽하게 육지화된 관광지이지만, 섬의 북쪽은 여전히 남북 대치의 긴장감이 감도는 군사분계선입니다.



다리가 놓인 섬 속의 섬, 석모도


석모도(席毛島)는 강화도 서쪽에 위치한 섬입니다. 지리교육과 3학년 시절 추계답사로 처음 이 작은 섬을 방문했는데, 강화도 외포항 선착장에서 1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도 강화도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섬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석모도로 갈 때는 차에서 일단 내려 배를 타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갈매기 소리를 함께 느끼며 진짜 섬으로 들어간다는 설렘을 느꼈습니다.

(좌) 2009년 답사 때의 눈썹바위, (우) 2024년 여름의 눈썹바위


그런데 2017년 석모대교가 개통되면서 석모도는 강화도와 이어진 또 하나의 육지가 되었습니다. 항구에서 배를 기다릴 필요 없이 그저 1분 만에 차로 휙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러한 접근의 편리함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석모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섬만이 갖는 낭만이 사라지게 된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도 듭니다.


저처럼 지리교육과 학생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석모도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 보문사(普門寺)입니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한 보문사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절 뒤편의 낙가산 중턱에 자리한 눈썹바위 때문입니다. 눈썹바위는 지리학에서 지형의 형성 과정 중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판상절리가 잘 발달한 곳입니다. 저는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 눈썹바위를 보기 위해 다시 산을 올랐습니다.


눈썹바위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습니다. 보문사의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매표소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됩니다. 경사가 꽤 급한 돌계단과 숲길을 15분 남짓 걸어올라 가면 온몸에서 땀이 쏟아지고 숨이 턱턱 막힙니다. 그래도 이렇게 분명한 목적지를 갖고 걷는 여행은 그저 아무 목적 없이 걷는 것 이상의 매력을 갖습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두 눈에 압도적인 판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바위 절벽에는 마치 사람의 눈썹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가 서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 바다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불경 소리에 맞춰 불자들은 합장하며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경 만은 진짜입니다. 바다의 시원한 바람과 은은한 향냄새가 어우러지면서 미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이게 바로 땀을 흘리며 목적지에 올라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탁월한 보상이죠.

눈썹바위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눈썹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서해 바다는 동해나 남해의 푸른 바다와는 다릅니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은 썰물 때가 되면 바닷물은 저 멀리 물러나고 생명을 품은 거대한 대지가 그 속살을 드러냅니다. 그 갯벌 위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갯골과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 그리고 그 너머 수평선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서해 바다는 이처럼 동해처럼 웅장하거나 남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분명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풍경을 하늘에서 드론으로 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갯벌과 섬, 그리고 눈썹바위를 함께 담아낸다면 정말 멋진 그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드론 비행 가능 여부를 알려주는 앱을 켰는데 스크린에 표시된 지도에는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뜹니다. '비행 금지 구역 (No Fly Zone)' 순간적으로 바로 이곳이 북한 땅이 코앞인 접경지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 바다 건너편은 우리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군사 지역이었던 겁니다. 드론을 날리지 못하게 된 아쉬움보다 이 섬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끼게 된 순간입니다.


적당히 땀을 식힌 후 여유롭게 하산했습니다. 점심 메뉴는 냉면으로 정했습니다.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는 황해도식 냉면이 유명하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본 기억 때문이었죠. 물론 즉흥적으로 찾은 냉면집은 육전이 올려져 있는 진주식 냉면이었습니다. 황해도식이면 어떻고 진주식이면 어떻습니까. 땀을 흠뻑 쏟고난 후에 먹는 냉면은 항상 옳습니다. 살얼름 낀 냉면 육수에 쫄깃한 면발과 새콤달콤한 양념의 조화가 온몸에 짜릿하게 전달됩니다.

강화도에서 맛본 진주냉면의 맛


강화도는 끝없는 외세의 침략에 맞섰던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남겨진 곳이면서 민족의 분단의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최전방의 섬입니다. 그와 동시에 수도권 주민들이 주말에 쉽게 드라이브하면서 카페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적인 얼굴들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강화도는 대한민국의 역사의 아픔과 현재의 모습을 고스란히 압축해 놓은 살아있는 역사박물관 같은 섬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