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해 골리앗이 된 아버지

[섬토리텔링] 거제 조선소에서의 37년 간의 삶

by 지리는 강선생

거제도 곳곳에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보입니다. 그 아래서 평생을 보낸 이들에게 조선소는 단순히 월급을 받는 직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겁니다. 저는 이번 섬토리텔링 거제 답사를 통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태동기서부터 현재까지 거제 조선업의 파고를 온몸으로 경험한 베테랑 노동자 강인철(가명)씨를 만났습니다.


이석: 아버님, 바쁘신데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제도 조선소에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오시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인철: 처음 거제 땅을 처음 밟은 건 1984년 말이었어요. 그때가 어떤 때였냐하면, 대우조선이 부산에 있던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서 한창 조선소를 짓고 다듬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고향이 충청북도 충주인데,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워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전국을 떠돌았어요. 그러다 ‘거제도에 가면 큰 조선소가 생기는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짐을 쌌어요. 막상 거제에 와보니까 조선소는 아직 완공도 안 된 황무지 같았는데, 저처럼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벌써 바글바글했어요. 다들 식구들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었던 거죠.


이석: 1980년대 중반이면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이 시설이 열악했을 텐데, 조선소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인철: 조선소에 와서 처음 배운 게 ‘샌딩(Sandblasting)’ 작업이었어요. 쉽게 말해 배를 만들기 전 거대한 철판에 낀 녹을 벗겨내는 일이예요. 엄청난 압력으로 쇠구슬 입자를 철판에 쏴대는데, 그 소음과 먼지는 상상도 못 할 정도에요. 두꺼운 두건을 뒤집어쓰고 외부에서 산소를 공급해 주는 호스 하나에 의지해 숨을 쉬며 일했어요. 한여름 철판 온도는 50도를 넘나드는데, 그 안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도 집에 있는 처자식을 생각하며 다시 호스를 꽉 잡았어요. 지금은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 한국 사람들은 거의 하지 않는 소위 3D업종이었죠.


이석: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당시 조선소 현장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이었겠네요. 아버님께서도 작업하시다가 큰 사고를 겪으셨다고 들었어요.


인철: 조선소에서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와요. 저도 1991년에 죽을 뻔한 고비가 있었어요. 배 내부 4층 높이에서 작업하다가 발을 헛디뎠는데, 그대로 2층까지 추락했어요. 그때가 우리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지 딱 3주 되었을 때였어요. 허리를 크게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통증보다도 ‘내가 다시 못 걸으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어요. 하반신 마비가 될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죽기 살기로 재활했어요. 결국 다시 복직은 했지만 현장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이후에는 공구실이나 자재 관리 쪽으로 옮겨야 했어요. 지금도 비가 오려 하면 그때 다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지만, 그 상처 덕에 우리 애들 대학까지 보냈으니 훈장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이석: 정말 큰일 날뻔 했네요. ‘조선소 다니면 돈을 많이 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그 이면에는 엄청난 위험이 숨겨있었네요.


인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어요.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 시급이 높아서가 아니라, 시간과 건강을 통째로 갈아 넣었기 때문이거든요. 조선소 기본급은 사실 그렇게 높지 않아요. 대신 남들 쉴 때 잔업하고, 주말에 특근을 해야 돈을 모을 수 있거든요. 한창 바쁠 때는 77일 동안 단 하루도 안 쉬고 일한 적도 있어요. 퇴근하고 나면 온몸이 천근만근인데, 그래도 돈이 조금 더 모이면 애들 학원 하나 더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퇴근하고 통영까지 가서 소형 선박 수리하는 ‘투잡’까지 뛰었어요.


이석: 정말 가족을 위해 끝없는 희생을 하셨네요. 그럼 아버님이 겪으신 거제도의 황금기와 지금의 침체기는 어떻게 다른가요?


인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거제도의 조선업은 정말 대단했어요. 거제 거리에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퇴근 시간만 되면 오토바이 수천 대가 쏟아져 나오고 식당마다 빈자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2010년 넘어서면서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경기가 꺾이니 부동산 값은 억 단위로 떨어지고, 평생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하나둘 짐을 싸서 떠나는 걸 지켜봤어요. 요새는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는데, 그 친구들은 고향으로 돈을 보내느라 거제도 안에서 소비를 거의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거제도의 조선업이 아무리 살아나도 예전의 활기를 찾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죠.


이석: 최근 기술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조선업은 여전히 사람의 손길, 노동력이 중요하다고 하던데 맞나요?


인철: 지금 우리 회사가 만드는 LNG선 한 척 값이 2,700억 원이 넘는다고 해요. 예전에는 수천명이 매달려야 했지만, 이제는 로봇이 용접을 자동으로 다 해주기 때문에 생산성이 몇 배는 좋아졌어요. 하지만 배의 머리 부분이나 아주 정교한 곡면은 로봇이 하지 못해요. 결국 수십 년간 쇠 냄새 맡으며 일한 우리 같은 숙련공들의 감각과 배짱이 있어야 배가 완성되죠. 한국 조선이 세계 1등을 유지하고 있는건 단순히 최첨단 기계 덕분이 아니라,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현장을 지킨 아버지들의 땀방울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이석: 마지막으로 평생을 바친 조선소, 그리고 거제도는 아버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인철: 저에게 있어 거제도는 '가족을 위한 사투의 현장'이었어요. 젊었을 땐 이 섬이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아침마다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 아래로 출근하면서 내가 지고 있는 가장의 무게가 저 크레인만큼이나 무겁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 사회의 일원이 된 것을 보면 그 희생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그러니까 거제도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린 고마운 땅이예요. 비록 몸에는 여기저기 산재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제가 그동안 용접한 거대한 배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는 걸 보면 마치 내 자식들이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라요.


인터뷰를 마친 후 거제도를 떠나면서 다시 한번 조선소를 바라보니, 골리앗과 크레인들이 마치 거대한 십자가처럼 보였습니다. 저 무거운 쇳덩어리들 아래서 강인철 씨와 같은 수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청춘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일했다는 생각에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거제도는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해온 거대한 엔진인 동시에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가족을 위해 써 내려간 희생의 흔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