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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Mar 19. 2021

모든 장소에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Project Memories on the map의 시작

'여행이 부르는 노래'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계획해오던 프로젝트였습니다. 그 시작은 장소성과 장소애(topophila)입니다. 약 10년 전, 음악을 하는 친구가 작곡한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뮤지컬 제목은  '삼선동 4가'.


뮤지컬 포스터에 그려진 추억 지도에는 삼선동에 사는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이 적혀있었습니다. '뮤지컬 삼선동 4가'는 이처럼 삼선동이라는 장소에 기록된 사람들의 기억과 그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뮤지컬을 관람한 후에 '모든 장소에는 다양한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사람들마다 모두 다르게 적힌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장소(place)는 객관적인 자료로 표현될 수 있는 공간(space)과는 달리 주관적으로 기억됩니다. 똑같은 장소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또한 같은 사람이어도 각자의 상황과 시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됩니다. 당시의 제 생각이 담겨있는 글이 여행이 부르는 노래 30화, '평범한 하루가 여행이 될 수 있다면'입니다.


처음에는 장소마다 다르게 기억되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지도에 담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막 등장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위치기반 앱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앱들은 위치기반의 다양한 객관적인 '공간의 정보'를 알려주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저마다의 '장소의 기억'을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장소의 기억을 추억(Memory)이라고 가정했고, 이런 사람들의 따뜻한 기억들을 지도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젝트명은 지도에 많은 사람들의 추억들을 담는다는 의미로, 'Memories on the map'으로 정했습니다. 줄여서 M.O.M. 이 '맘'이란 어감도 따뜻한 엄마를 뜻하는 것이라서 사람들의 따뜻한 추억을 지도에 담는다는 프로젝트의 취지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차갑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위치기반 앱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이고 따뜻한 추억을 공유하는 위치기반 앱이 앞으로 더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자신과 타인의 과거로의 추억여행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최근 유행하는 레트로(Retro)적인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프로젝트 'Memories on the map'의 세부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개인 이용자는 각자 자신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맵 기반 앱에 기록합니다. 그것은 사진이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으면, 당시에 들었던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 비공개, 친구 공개로 변경할 수 도 있습니다. 일종의 장소 기반 SNS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비공개라면 추억의 장소에 적혀있는 자신만의 일기장인 셈입니다.


그렇게 각각의 장소마다 많은 사람들의 추억, 기억이 쌓이게 되면, 그 장소마다 각각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기억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형성될 것입니다. 내가 첫사랑과 데이트한 장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첫 키스한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이별의 장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Memories on the map'은 자신의 장소에 대한 기억을 지도에 기록한 일종의 자신만의 지도 일기장이 될 수 도 있고,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공유하는 장소 기반 커뮤니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취미나 직업이 같은 사람들 간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저는 추억의 장소마다 떠오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 당시의 기억이 마치 영화처럼 머릿속에 되살아나곤 합다. 이런 기적 같은 환상이 오직 저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M.O.M'에 적히는 추억들에는 음악이 함께 덧붙일 것을 명시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오지 않았던 개념이지만 QR코드와 비슷한 형태로 말이지요.


문제는 당시 저는 이러한 앱을 개발할 능력과 돈,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조금 더 열정이 있었더라면 그때라도 코딩을 배우고, 평소 관심 있던 디자인을 연마해서 자그마한 결과물을 만들었겠지만, 그 당시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냥 아직은 구상뿐인 아이디어를 몇 번의 공모전에 제출하는 것으로 저의 맘 프로젝트는 그렇게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2011년 7월, 전국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경상남도 통영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방금 했던 여행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봐도 좋을 것 같아"


순간,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생각해오던 'Memories on the map' 프로젝트를 내가 갖고 있는 장소에 대한 기억의 기록으로 우선 시작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해왔던 저의 여행 이야기들도 모두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했던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관광지보다는 뒷골목에 있는 작은 선술집과 우연히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들의 집들에 더 많은 추억이 있었고, 이런 소소한 여행의 추억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머릿속에 잠들어있던 장소의 기억을 조금씩 구체화해 나갔습니다. 영어 기숙사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소규모 영어 수업을 진행했을 때입니다. 'Recipe of Journey', 여행의 조리법이라는 주제로 수강생들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게 해 봤습니다. 학생들은 작고, 큰 저마다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그 여행의 기억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수업을 시작하며 처음에 사례로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여행이 부르는 노래 8화 'Love story in Italy'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여행이 만드는 노래'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강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저의 짧은 여행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저의 여행 이야기로 사람들이 '그때의 그 장소'로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는 그동안 여행했던 기억들을 되살려 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을 했으며, 시련을 겪으며 아파하고 성장했습니다. 또한 크고 작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했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이고 쌓인 저만의 장소의 기억들을 작년부터 글로써 구체화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보고, 만나고,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 속에 항상 음악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여행이 부르는 노래'로 정했습니다. 여기서 '부르는'은 노래를 부르는 'Sing'이 되기도 하고, 불러일으키는 'Attract'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브런치북 '여행이 부르는 노래'는 제가 10년 전 '뮤지컬 삼선동 4가'를 보면서 처음 떠올렸던, '모든 장소에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모두 다르게 적힌다.'는 생각이 구체화된 결과물입니다. 처음의 생각은 '앱'이라는 디지털이었지만, 실제 10년 후에 '책'이라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머릿속 어딘가에는 계속 처음의 결심과 열정이 남아서 이렇게 한 편의 책으로 구체화되어서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부르는 노래'는 10년 전 계획했던 프로젝트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욱더 '장소에 대한 기억'에 집착스럽게 파고들 것이라는 다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고, 추억하는 그런 '엄마'처럼 따뜻한 장소 기반 커뮤니티를 만들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여행이 부르는 노래: 기억을 걷는 시간 - 넬(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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