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처럼 귀엽고 순둥순둥 한 얼굴 생김새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아지상'이라 부르고, 고양이처럼 도도한 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양이상'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꼬부기상'이 대세인 것 같다. 꼬부기는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포켓몬으로 귀여운 외모 덕분에 주인공 지우의 파트너 피카츄의 인기를 넘어설 정도이다.
꼬부기상을 유행시킨 연예인은 아무래도 원조 꼬부기 하연수다. 방송에서 직접 꼬부기 코스프레를 하고 나오는 것을 보면 자신의 별명이 꼬부기인 것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마마무의 메인 보컬 솔라도 역시 대표적인 꼬부기상. 시원시원한 보컬 실력뿐만 아니라 귀여운 표정과 은근히 허당끼가 있어서 인기가 많다. 그리고 최근에 은혜 갚은 예비군들의 엄청난 화력으로 4년 만에 역주행하고 있는 롤린 롤린 롤린 브레이브걸스의 꼬북좌, 유정도 떠오르는 꼬부기상이다.
꼬부기 상들의 공통점이라면 동그란 얼굴에 큰 입, 그리고 웃을 때 반달로 바뀌는 눈, 이 세 가지가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꼬부기상보다 더 본원조 꼬부기가 있다. 바로 지금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김꼬북이다. 김꼬북 피셜에 따르면 그녀는 20년도 전부터 꼬부기라고 불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뭐만 하면 "꼬부기 물대포!" 하고 놀려서 꼬부기란 별명이 너무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꼬부기 상이 대세가 되다 보니까 최근에는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다.
최근에 롤린이 역주행하고, 브레이브걸스의 꼬북좌가 계속 SNS와 유튜브에 나오면서 "나도 이 기회에 한 번 이 롤린 코인과 꼬북 코인에 탑승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리는 강선생이 김꼬북을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강원도 정선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며 역사와 사회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여름이 막 끝나가고 있을 8월 말 무렵, 오랜만에 W한테 이렇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혹시 소프라노 좋아하세요?"
W는 3년 전 성당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을 때 만났던 여학생으로 당시에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깜빡이 없이 바로 파고드는 질문에 약간 당황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되물으니까, W는 자기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성악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지금 레슨 선생님이 소프라노인데,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진짜 진짜 잘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또 서울에서 레슨도 하고 지금은 시립합창단에서 수석단원을 맡고 있다며 칭찬을 마구 늘어놓았다.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에 살짝 정신이 혼미해왔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W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정선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춘천이나 서울은 정말 먼데, 그분이 괜찮으려나?" 나의 약간은 걱정스러운 질문에 W는 "네! 쌤은 아무 상관없대요!"라고 대답했다.
순간, 노래도 정말 잘하고, 능력 있고 거기다가 예쁘기까지 한 소프라노 분이 살짝... 급하신가?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어차피 2주 후에 춘천에서 제자들과의 약속도 있었고, 오랜만에 W도 볼 겸 큰 부담 없이 소프라노와의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2주 후, 교생 때 처음 만났던 제자들과 만났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고 형이라고 부르는 고마운 녀석들이다. 술을 마시면서 내일 소프라노와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니까, 대박이라면서 잘해보라고 응원한다. 2차로 노래방에 갔고, 나는 내일 소프라노를 만나니까 간만에 이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7-0-9-5, Steel heart의 She`s gone. 고1 때부터 1000번은 족히 불러서 호흡까지 다 외워버린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내지르며 제자들과의 밤을 불사 질렀다.
다음 날, 전날의 숙취를 가득 안고 W를 만나러 갔다. 헛개수를 세 통이나 마셨지만 아직도 속이 메스껍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제자가 소개팅까지 시켜주니까 해장국을 사줄 순 없었다. W는 빕스를 먹고 싶다고 했고, 나는 부대끼는 속을 움켜잡고 퍽퍽한 스테이크를 썰었다.
저녁에 되어서 강원대학교 병원 맞은편 지하에 있는 '커피안'으로 갔다. 대학 다닐 때부터 자주 가던 카페로 분위기가 아늑하고 드립 커피 맛이 아주 좋다. 커피안 안쪽 자리에 앉아서 5분 정도 기다리니까 그녀가 도착했다. 사실 어제 춘천시립합창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수석 소프라노의 사진을 미리 찾아봤었다. 그리고 약간 실망을 했었는데, 오늘 직접 실물로 보니까 딱 내 스타일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착한 인상, 너무 마르지도 너무 통통하지도 않은, 그리고 키는 165 정도.
간단하게 서로 소개를 마치고 난 후에 나는 '이 사람이랑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상황을 객관화했다. 모아둔 돈도 없고, 차도 없고, 그렇다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은 계약직 기간제 교사. 그때, 31살의 나는 이제 막 스칸디나비아 여행을 끝마치고 와서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 상황이었지만, 통잔 잔고는 0에 수렴했고, 남들이 생각하는 나는 그저 그런 별 볼 일 없는 남자다.
스스로는 나 자신을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남들이 보는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모습을 허황되게 꾸미거나 혹은 거짓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사람과 '잠깐 만나봐야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잘해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솔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나의 이 객관적인 상황을 처량하게 나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소개팅을 할 때는 명사(Noun) 같은 사람이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삼성에 다닌다', '직업이 의사다', '연봉이 1억이다', '강남에 산다' 같은 말들이요. 아무래도 소개팅이 빠른 시간 내에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형용사(Ajective) 같은 사람인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열정적이다' '창의적이다' '여행을 좋아한다' '기타를 연주할 줄 안다' 같은 형용사들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이 발언을 듣고 난 후,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럼 이석 씨를 형용사로 표현하면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것들, 자신의 성격, 취미 같은 서로의 형용사를 이야기했다. 처음이라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상대방을 재고 다른 무엇과 비교하지 않아서 첫 만남의 느낌은 좋았다.
그렇게 1시간째 이야기하고 있는데, W는 아직 안 가고 앉아서 우리의 모습을 한 번씩 계속 불안하듯 지켜보고 있다. 나도 그렇지만 현재 W의 레슨 선생님인 그녀는 학생 앞에서 남자와 이야기하는 게 여간 어색한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W에게 "너 이제 안 가니?"라고 넌지시 이야기했고, W는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 집으로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W는 3년 전 중고등부 교리 선생님일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내가 중고등부 교리 교사를 그만둔 후에도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나의 사진과 글들을 엄마에게 보여주면서 이야기했고, W의 엄마께서도 나에 대해서 괜찮게 생각하셨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W의 레슨 선생님과 나를 연결해주신 것이다. 아무튼 W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울었다고 한다.
W가 간 후에,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겨서 맥주를 마셨다. 술이 한 잔 들어가자 어색했던 분위기도 사라졌고, 서로에 대해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각자 여름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여행 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서로에게 보여주면서 설명해줬다.
그리고 음악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내가 음악 영화 원스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도 원스를 너무 재밌게 봤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당시에 개봉했던 음악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만난 지 2시간 만에 우리는 심야영화 데이트를 했다.
영화 '비긴 어게인'은 내용과 음악이 모두 참 좋았다. 특히 Maroon 5의 보컬 애덤 리바인이 부른 Lost star는 귓가에 계속 울릴 정도로 기억에 남았다. 기분 좋게 영화를 본 후에 12시가 넘어서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내일 또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서도 계속 카톡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어제와 달리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그녀가 나타났다.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와 유포리 동치미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춘천의 전망이 한눈에 보이는 구봉산에 있는 카페, 쿠폴라에 갔다. 거기서 어제 못 다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알아갔다. 그렇게 춘천의 소프라노와 정선의 사회 선생님은 조금 더 편해졌고, 그만큼 더 좋아졌다.
그렇게 기분 좋은 대화를 끝마치고 다음 주에 서울에서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 구봉산에서 내려오는 길 조수석에 앉아있던 나는 갑자기, 불현듯, 정말 뜬금없이, 지금 이 순간에, 옆에 앉아있는 소프라노 앞에서 '나도 이만큼 고음을 잘 낼 수 있다!'를 보여줘야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아직 술이 덜 깨서였을까? 아니면 이틀 전에 제자들과 노래방에서 했던 '그 노래'가 스스로 너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음악 앱을 실행했고, 3옥타브 솔의 미친 고음을 지닌, 노래방에서 누가 하면 머리채를 잡고 뜯어말리고 싶다는 그 곡, Steel heart의 She`s gone의 MR을 재생하고야 만다.
웅장하면서도 차분한 피아노 소리는 어느새 찢어지도록 처량한 일렉기타 소리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는 내리막길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소프라노 앞에서 She`s gone을 부르고 만다! 거침없이 한 호흡, 한 호흡, 한 마디마디, 처절한 절규는 6분 30초 동안 끊이지 않았고, Lady Oh Lady! 결국 나는 소프라노 앞에서 전설의 그 곡을 완창 하고야 만다.
노래를 다 듣고 난 후 그녀는 "그래도 신기하게 피치는 다 올라가시네요"라고 말했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 조수석에 앉아서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일 텐데도 그녀는 차분하게 전문가의 입장에서 내 노래를 분석해줬다. 그리고 "용기가 대단하시네요"라고 칭찬도 덧붙여줬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이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노래방도 아닌 차 안에서, 그것도 She`s gone을 해버린 나는 정선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서 '과연 우리가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걱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가 정말 떠나가 버리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이 밀려왔고 나는 이불킥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