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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Mar 23. 2021

사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

김꼬북에 대한 기억2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은 서울 대학로에서 하기로 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혜화동에서 나의 고등학교 친구를 같이 만나기로 했다. 만난 지 얼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친구를 소개해주는 이유는 우선 그 친구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작곡가인 그 친구와 소프라노인 그녀와는 같은 대학 동문이기도 하니까 음악과 더불어 대화의 공감대도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내 친한 친구를 소개해줌으로써 그만큼 내가 당신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만나서 연극을 좋아하는 지인이 소개해준 연극 '수상한 흥신소'를 봤다. 연극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중간중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도 많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참 좋았다. 특히, 주인공 할아버지가 달을 보면서 떠나간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She`s gone을 앉은자리에서 미친 듯이 부르던 사람이 두 번째 만남에서는 연극을 보면서 흐느끼며 우는 모습을 보이다니!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녀도 연극을 매우 재미있어했고, 탁월한 연극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연극이 끝난 후, 아직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남아서 대학로를 한 바퀴 걷기로 했다. 9월 말, 이제 약간씩 쌀쌀해지는 날씨에 그녀와 나는 서로의 트렌치코트를 아주 살짝씩 스치면서 걸었다. 어색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음악! 지난주에 봤던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남녀 주인공이 함께 음악을 장면이 나온다. 그때, 두 주인공은 'Y형 이어폰 젠더'를 사용하여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꼽는 것이 아니라, 각자 양쪽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온전히 같이 듣는다.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것을 준비해왔다.


우선 지난주에 봤던 영화 '비긴 어게인'의 OST를 같이 들었다. 음악을 들으면 신기하게도 과거 음악을 들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매력적인 목소리와 지금 이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은 멜로디의 'Lost star'는 그녀와 나를 지난주 영화를 봤던 그 순간, 그리고 영화 속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한곡 씩 선곡하며 같이 음악을 듣다가, 최근에 내가 듣고 있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을 재생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돼'라는 가사가 불안한 이 시대의 청춘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곡이다. 그녀는 처음 들어본 노래인데 가사와 멜로디가 참 좋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씩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이다.




약속 시간이 되어 친구를 만났다. 샤부샤부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이상하게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보다 친구와 함께 있으니까 더 긴장이 됐다. 작곡가 친구는 그녀와 음악, 학교, 그리고 아는 교수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나는 계속 소주만 들이켰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떨리는 마음에 그녀와 나, 친구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음 주에 또 만나자는 약속은 했다.


그녀가 돌아간 후에 친구에게 "어떤 것 같아? 괜찮아?"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너가 괜찮아서 잘 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라며 우선적으로 그녀가 내가 마음이 드는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오랜 기간 나를 봐왔고 또 잘 알고 있는 친구 녀석이 그녀는 성격, 외모, 직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나한테는 과하게 넘치게 괜찮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렇게 친구가 그녀에 대해서 좋게 보고 칭찬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오랜 술친구인 우리는 자주 가던 대학로의 술집과 또 다른 술집을 레퍼토리처럼 거친 후에 마지막으로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항상 취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죄송한 친구의 어머니가 맛있게 차려주신 황탯국을 먹으며 해장했다.


친구 집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정릉에 갔다. 센티해지는 가을 날씨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서 일까? 몇 해전에 봤던 영화 '건축학 개론'이 생각났고, 그 배경이 된 정릉을 걸어보고 싶었다. 정릉에 들어서니 초가을 향기가 물씬 난다. 시원한 가을 하늘을 보며 벤치에 누워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했다. '다음 주에 만나면 여기 정릉에서 주운 도토리를 하나 줘야지.'


서로 만나지 않는 평일에는 전화와 카톡으로 각자의 일상을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른 공연 영상을 보내주기도 했고, 춘천의 거리 모습을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같이 보고 같이 들었던 영화 '비긴 어게인'의 노래  'Lost star'를 기타로 연주해서 그녀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마치 첫날의 'She`s gone'을 만회라도 하듯이, '나도 맨날 이런 노래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가 좋다고 했던 가수 '브로콜리너마저'의 '유자차'란 노래를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 불렀고, 그 동영상을 찍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참 따뜻하다고 칭찬해줬고, 나는 그렇게 첫날의 실수를 만회했다.


세 번째 만나는 날. 오늘은 그녀에게 내가 기간제 교사라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녀와 좀 더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백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결심했다. 버스가 춘천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조금씩 떨려왔지만, 괜찮다. 지금 내 마음은 진심이고, 그녀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팔호광장 2층 카페에서 만나 그녀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갑자기 진지모드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하니까 그녀는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지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사실 지금 기간제 교사에요. 처음 시작할 때는 잘 몰랐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도 잘 맞고, 내가 아이들을 이렇게 사랑하는지 신기하기도 했어요. 내년 2월이면 지금 있는 정선중학교에서 계약기간이 끝나요.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JY씨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이야기했고,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물었다. "그럼 올해 임용 시험은 보세요?"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고, 또 틈틈이 여행을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나의 이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어느새 편안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던 말을 꺼내놓으니까 홀가분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과 표정,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대로인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 사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구나!'




네 번째 만나는 날. 오늘은 오전에는 창덕궁을 둘러본 후에 낮에는 그녀의 친구 부부를 소개받고, 저녁에는 당시 핫한 잠실 석촌호수의 러버덕을 보러 가는 나름대로 알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그녀에게 고백하는 날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같이 사진을 찍자고는 이야기 못 하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조선의 궁전을 거닐었다. 그렇게 서로 발걸음을 나란히 하며 걷다가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런 궁전을 오면 마음이 참 편해져요. 아마도 전생에 공주였나 봐요."


평소 같으면 정말 오글거릴 수도 있는 뜬금없는 그녀의 멘트가 그때는 왜 그리도 사랑스럽게 들리던지. 그녀는 자기도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멀찌감치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느지막한 오후에 친구 부부를 만났다. 친구 부부는 둘 다 예술가이다. 그녀와 중학교 동창인 현정 씨는 작곡을 전공했고, 주로 영화 음악을 만든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당시 개봉한 영화 '족구왕'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영화감독이다. 음악과 영화를 너무도 좋아하는 넷은 별다른 어색함 없이 금세 대화가 어울어졌고, 식사 후에는 경복궁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예술가 부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역시 예술가인 그녀와 예술을 너무도 사랑하는 내가 함께하는 미래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기도 했다. 감독님은 둘의 모습이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린다며 분위기 있는 나와 그녀, 두 사람의 첫 번째 사진을 남겨줬다.


저녁에 되어 러버덕이 있는 잠실로 향했다. 이제 반쯤 지어진 롯데 타워의 불빛이 석촌호수에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석촌호수는 ∞의 형태이기 때문에 처음 방향을 잘못 잡으면 호수 한 바퀴를 모두 돌아야지 러버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러버덕이 있는 바로 옆에서 시작했음에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30분이 훌쩍 지내서야 러버덕을 찾을 수 있었다.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걷고, 만나고, 이야기해서 지쳤을 법도 한데, 가을밤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그녀와 걷는 그 순간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드디어 마주한 러버덕 앞에서 아직은 어색하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어떤 커플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사진도 찍어준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러버덕 앞에서 두 번째 커플 사진을 남겼다.


그녀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바래다주는 길. 나는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고, 그래도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나는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 가서 한 잔 하자고 했다. 사실 오늘 그녀를 만나러 오면서부터 '오늘은 꼭 고백을 해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 말을 언제 해야 할지,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할지 타이밍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그 중요한 한 마디를 하려고 했다. 안주를 시키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와 함께 있는 그녀에게 말을 꺼내려하는 순간, 이자카야에서 케이윌의 '오늘부터 1일'이 나온다.


'오늘부터 내꺼해줄래'라는 가사에 목구멍까지 넘어왔던 나의 고백은 다시 들어갔고, '너만 생각하면 미치겠어'란 가사에 그녀도 부끄러운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자카야의 오디오가 고장 났는지 후렴구 '웬만한 남자보다 내가 더 잘할게 my love 너를 사랑해'가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해서 나왔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너랑 내가 제일 잘 어울린대.' 가사를 다섯 번쯤 들었을 때는 우리 둘 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이자카야 사장님 덕분에 우리는 케이윌에게 '오늘부터 1일'을 축가를 원 없이 들었다.


이자카야를 나와서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녀가 나를 바래다준다고 했고, 우리는 최대한 천천히 천천히 걸었지만 어느새 찜질방 앞에 도착했다. 아쉬운 마음과 아직 고백을 못 했기 때문에 다시 오피스텔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그녀가 "그럼 잘 들어가요"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손을 잡고 싶은데 안아주고 싶은데
왜 내가 조심스럽지 왜 내가 조심스럽지

걷다가 닿는 어깨에 내 맘이 깊게 설레네
별것도 아닌 스킨십에 왜 내가 설레오는지 알죠

당신의 웃음 앞에선 나도 순수해지네요
이런 애틋한 감정이 나는 너무나 좋아요

당신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귀가 떨려오네요
이런 애틋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
만남이란 말이 나는 너무 좋아

정말 예쁜 여잔 당신 같은 여자
가만히 있는데 보고 싶은 사람 그대는 알겠죠

노래를 끝마친 후에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가사처럼 손을 포개어 잡았다.


시간은 11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리고 정말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오늘부터 1일'이 되었다.



여행이 부르는 노래: 사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 - 장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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