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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고요히 흐른다》

김석용 에세이 전자책

by 화려한명사김석용

《기억은 고요히 흐른다》
- 김석용 에세이 전자책 -

프롤로그
: 고요한 자리에 흐르는 시간

1장. 익숙함 속의 작은 떨림
- 아침 인사, 매일 같은 듯 다른 시작
-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 복도 끝 창가에서
- 이름을 잊은 이가 전하는 말

2장. 계절이 다녀가는 자리
- 봄, 다시 피는 마음
- 여름, 그늘 아래 숨 쉬는 기억
- 가을, 낙엽을 줍는 손길
- 겨울, 말없이 따뜻해지는 오후

3장. 삶이라는 책갈피
- 그날, 처음 만난 손
- 장례식 뒤의 오후
- 함께 걷는 길, 천천히
-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

4장. 기억은 흐르되, 사라지지 않는다
- 잊혀져도 여전히 곁에
- 유난히 조용했던 날
- 사진 속에서 다시 웃는 얼굴
- 침묵이 건네는 말

5장. 내가 머문 자리
- 보호자의 눈빛
- 오늘도 면회가 많네요
- 더캐슬 요양원, 고요한 연못
- 내일도 우리가 있을 자리

에필로그
: 잊지 않으려 하지 않아도, 기억은 고요히 흐른다

프롤로그
고요한 자리에 흐르는 시간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아주 조용히 흐릅니다.
더캐슬 요양원.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오직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숨결과 미세한 진동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잊고 지나쳤을 아주 작은 몸짓, 어떤 이는 더는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이름 하나. 그런 것들이 이곳에서는 하루의 중심이 됩니다.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의 하루를 지켜보며 살아갑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이들과,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보호자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 조용한 이야기들.

삶이란 무엇일까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떠나고…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남는 것은 결국 '기억' 아닐까요. 그러나 기억이란 꼭 선명해야만 하는 걸까요? 잊힌 이름 속에서도 남는 감정이 있고, 흐려진 얼굴 속에도 따뜻함은 남습니다.

나는 오늘도 이 조용한 자리에서,
고요히 흘러가는 기억들을 곁에 두고, 잊히는 존재들을 향해 마음을 씁니다.
언젠가는 나 역시 누군가의 흐릿한 기억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 기억조차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온기가 되기를, 조용히 바라며.

이 글은 그런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이들의 시간을, 기억을, 그리고 그 곁의 나를 조용히 써내려갑니다.

1장. 익숙함 속의 작은 떨림


아침 인사, 매일 같은 듯 다른 시작

“좋은 아침입니다.”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이 말로 열립니다.
하지만 똑같이 들리는 이 인사 속에도 하루하루의 빛깔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날은 미소로, 어떤 날은 고개 끄덕임으로, 또 어떤 날은 말없이 건네지는 눈빛 하나로 그 대답이 돌아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천천히 눈을 뜨십니다. 이마엔 희미한 주름이 깊어져 있고, 숨결은 얇게 이어져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른 아침,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말없이 커튼을 걷습니다. 그 순간 들어오는 햇살이 방 안을 감싸 안을 때, 어르신의 눈동자에 조용한 빛이 스며듭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네요.”
그 말에 대답은 없지만, 이내 이불 위에 올려진 두 손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누워 있는 하루와 앉아 있는 하루,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인 이곳에서, 작은 몸짓 하나는 곧 큰 용기입니다.

나는 물컵을 채워 들고, 고요히 침상 곁에 놓습니다.
물이 담긴 유리컵에 비치는 햇살이 흔들리는 걸 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이 아침,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낸다.’

시간은 여전히 흐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작지만 분명한 떨림을 안고, 익숙한 하루를 살아갑니다.
같은 동작, 같은 말, 같은 길.
하지만 결코 똑같은 하루는 없습니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떨림이, 우리 삶의 증거입니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이른 아침,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 일입니다.
요란하지 않게, 하지만 제법 묵직하게 울리는 물 끓는 소리.
그리고 곧 퍼지는 은은한 커피 향.
그 향기는 어르신들보다 먼저 나를 깨웁니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마주 앉은 어르신과 나는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좋습니다. 서로 마주한 얼굴에 감정이 흐르고, 묵음의 공간 속에도 따뜻함은 흘러갑니다. 나직이 건네는 “따뜻하실 거예요”라는 말에 어르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이 커피는 어쩌면 한 잔의 음료가 아니라, 삶의 쉼표일지도 모릅니다.
침묵 속에 흐르는 향기와 온기, 그 사이에 놓인 커피잔 하나는 잊혀진 기억을 잠시 불러오기도 하고, 어딘가에 두고 온 마음을 다시 데려오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커피를 어떻게 드셨는지 여쭤보면, 가끔은 눈빛이 반짝입니다.
“젊을 땐 블랙만 마셨어요.”
“남편이랑 새벽마다 커피 한 잔씩 했지.”
짧은 말 속에도 그들의 한 시절이 살아 숨 쉽니다.
그 말들이 나는 좋습니다.

커피를 다 마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반쯤 비워진 컵을 앞에 둔 채, 잠시 눈을 감고 계신 모습만으로도 좋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함께 머물렀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는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 식기 세척대로 옮깁니다.
빈 잔 안에는 커피보다 더 따뜻한 하루가 남아 있습니다.

복도 끝 창가에서

더캐슬 요양원의 긴 복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지나는 길입니다.
하얀 벽,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닥, 그리고 그 끝에 놓인 작은 창 하나.
그 창가를 지날 때면, 나는 늘 잠시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건 특별한 풍경이 아닙니다.
멀리 아파트 단지와 언덕,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 몇 대, 그리고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나무들.
하지만 그 익숙한 풍경 속에도, 하루는 다르게 스며듭니다.
오늘은 하늘이 유독 맑습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이 그 사이로 부서지듯 흘러내립니다.

창가 앞에는 언제나 의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침묵 속에서 가만히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기억을 더듬는 듯, 잊으려는 듯,
그 모든 시간들이 이 창가를 지나갑니다.

어르신 한 분이 조용히 앉아 계셨습니다.
말없이 창밖을 보고 계시기에, 나도 말없이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바깥 풍경, 좋으시죠?”
어르신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을 땐 저 길로 자전거 타고 다녔지. 딸아이 태우고… 그때가 좋았어.”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저릿해졌습니다.
잊힌 줄 알았던 기억은, 사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고요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어르신의 옆얼굴을 어루만지듯 비춥니다.
나는 그 빛이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세월은 많은 걸 흘려보내지만, 그 안에서도 기억은, 마음은,
조용히, 아주 천천히,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걸
나는 이 창가에서 배웁니다.

이름을 잊은 이가 전하는 말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단지 기억의 일부가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시간, 관계, 삶의 궤적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이름을 잊은 어르신들에게서
가장 깊고 선한 말을 듣습니다.

“저기, 저 사람은 누구지?”
“혹시... 우리 아버지는 괜찮으신가요?”

어르신은 어느 날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당황보다는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잊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듯한 눈빛.
그 눈빛 앞에 나는 말을 아끼게 됩니다.
진실보다 더 따뜻한 답을 건네는 것이 이곳에서의 예의일지도 모릅니다.

“아버님은 잘 계세요. 항상 어르신을 걱정하세요.”
그 말에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는 이름도, 나이도, 기억도 사라진 그 너머에서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날엔 어르신이 내 손을 꼭 잡고 말하십니다.
“고마워요. 이렇게 와줘서.”
나는 그 말에 마음이 저며옵니다.
나를 누구로 생각하시는지, 어떤 얼굴로 떠올리시는지 몰라도,
그 마음만은 진짜임을 나는 압니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마음의 진동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름을 잊은 이가 전하는 말은, 그래서 더욱 깊고 진합니다.
말을 잊은 말. 기억을 벗어난 진심.
그 속에 담긴 건,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릅니다.

2장. 계절이 다녀가는 자리

봄, 다시 피는 마음

어느새 창밖으로 봄이 왔습니다.
진달래가 언덕 너머에 피었고, 더캐슬 요양원의 마당에도 노란 민들레가 얼굴을 내밉니다. 겨울 내내 창문을 닫고 지내던 방 안엔 바람이 들어오고, 어르신들의 표정도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이제 봄인가 봐요.”
내가 웃으며 말하면, 한 어르신은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하십니다.
“또 한 해가 시작되는구먼.”

봄은 그렇게 돌아옵니다.
기억이 흐려진 이들에게도 봄은 남아 있습니다.
어릴 적 뒷동산에서 뛰놀던 기억, 아기 손을 잡고 공원을 걸었던 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을 보았던 그 순간까지.

내 마음도 봄바람에 조금씩 풀립니다.
마치 얼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봄은 새로움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계절입니다.

여름, 그늘 아래 숨 쉬는 기억

여름이 오면, 해는 길어지고 바람은 무거워집니다.
방 안의 온도를 자주 확인하고, 얼음물 준비에 분주해집니다.
어르신들의 이마엔 땀이 맺히고, 작은 선풍기 바람에도 시원하다며 웃으십니다.

나는 종종 어르신들과 함께 마당으로 나갑니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살짝 젖은 땀수건을 내밀며 말을 건넵니다.
“어르신, 더우시죠. 그래도 바람이 좀 불어요.”

어르신은 여름을 기억하십니다.
“예전에는 저녁 무렵 되면 집 앞 골목에 다들 나와서 부채질 했어요.”
그 말 속엔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여름은 조금 지치고, 조금 느슨해지는 계절이지만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집니다.
땀을 함께 흘리고, 그늘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숨결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됩니다.

더위 속에서도 따뜻함은, 살아 있습니다.

가을, 낙엽을 줍는 손길

가을이 오면, 더캐슬의 마당은 붉은 빛으로 물듭니다.
단풍은 수런수런 말 없이 바람을 따라 날리고,
나는 낙엽을 쓸며, 어르신들과 함께 천천히 걷습니다.

한 어르신이 낙엽 하나를 줍더니 오래 들여다보십니다.
“이렇게 예뻤나... 이런 걸 볼 새도 없었네.”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춰 섭니다.
그 낙엽 하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지난 세월이 고요히 담겨 있습니다.

나는 말없이 어르신의 옆에 앉습니다.
그리고 낙엽 하나를 집어 손에 쥡니다.
사각거리는 감촉,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그 모든 것이 가을입니다.

가을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제는 추억이 된 장면들,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나 자신.

낙엽을 줍는 손끝에서, 삶은 다시 한번 따뜻해집니다.

겨울, 말없이 따뜻해지는 오후

겨울이 오면, 바깥 풍경은 점점 무채색으로 바뀌어갑니다.
하지만 더캐슬의 실내는 오히려 따뜻해집니다.
전기장판이 깔린 침상, 푹신한 무릎담요, 따끈한 생강차 한 잔.
그리고 어르신의 손을 잡는 내 손끝의 온기.

한 어르신은 겨울이 오면 더욱 조용해지십니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깊어집니다.
나는 그 고요 속을 함께 걷습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손을 잡고 오래 머뭅니다.

눈이 내린 어느 날, 어르신 한 분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셨습니다.
“저 눈이 내릴 때마다, 옛 생각이 나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좋은 기억이세요?”
그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래요. 그땐 참 좋았지...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겨울은 끝이 아니라, 따뜻한 마무리입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계절이지만,
그 안에는 긴 시간을 품은 포근함이 있습니다.

말없이 따뜻해지는 오후,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삶을 배우게 됩니다.

계절은 다녀가지만,
그 안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은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꽃잎보다도, 햇살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은 그렇게, 계절을 타고 고요히 흘러갑니다.

3장. 삶이라는 책갈피

그날, 처음 만난 손

처음 손을 잡던 날을 기억합니다.
어르신의 손은 내 손보다 훨씬 작고, 마르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손을 잡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손이 지나온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견디고,
얼마나 많은 따스함을 주었을까.

어르신은 말없이 내 손을 가만히 쥐고 계셨습니다.
어떤 말보다 깊은 온기가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처음 만나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마음이 조용히 닿았습니다.

삶의 책갈피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말이 아닌 손끝의 기억으로.

장례식 뒤의 오후

어르신 한 분의 장례를 치른 날,
요양원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분들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셨고,
나는 천천히 침상을 정리했습니다.

그분이 쓰시던 컵, 담요, 그리고 아직 따뜻함이 남은 베개.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단지 그분만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이불을 개며 속으로 인사했습니다.
“잘 가세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접히고, 또 접혀서
한 장의 책갈피처럼 남는다는 걸
그날, 나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걷는 길, 천천히

오후 햇살이 길게 복도를 비출 때,
나는 어르신의 보조기를 붙잡고 천천히 걷습니다.
한 발, 또 한 발.
말없이, 그러나 절대로 멈추지 않고.

"조금만 더요. 저 끝에 창가까지만 가요."
그 말에 어르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숨은 거칠고 발은 느리지만,
그 안에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 걸음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더딘 걸음이라 말하겠지만,
그 걸음만큼 단단한 의지가 또 있을까요?

함께 걷는다는 건,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라는 길을
때로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함께 걷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

삶은 무거울 때가 많습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십니다.
“사는 게 참… 쉽지 않았어요.”
짧은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이 담겨 있는지
나는 늘 경청하게 됩니다.

어떤 어르신은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어서 미안할 때가 많았어.
가족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나는 말했습니다.
“살아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눈시울을 붉히던 어르신은,
조금 있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 참 따뜻하네요. 내가 잊지 않을게요.”

살아 있다는 것.
그건 단지 숨 쉬는 게 아니라,
무게를 견디며 하루를 살아내는 일입니다.

어르신들은 그 무게를 이겨낸 삶을 지니고 계셨고,
나는 그 곁에서
그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웁니다.

삶이라는 책갈피는,
시간 속에 조용히 접히며 남습니다.
그리고 그 책장을 다시 넘길 때마다,
우리는 비로소 그 순간의 의미를 다시 읽게 됩니다.

4장. 기억은 흐르되, 사라지지 않는다

잊혀져도 여전히 곁에

어느 날, 어르신 한 분이 내게 물으셨습니다.
“자네, 이름이 뭐였더라?”
그 순간 마음 한편이 허물어지는 듯했지만, 곧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냥, 김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을 잊고, 얼굴을 헷갈려도
어르신의 눈빛은 분명 나를 향해 있었습니다.
기억은 잊혔어도, 감정은 여전히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억’을 삶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기억이 아닌 ‘느낌’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배웁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함께했던 그 순간이 따뜻했다면,
그 마음은 어딘가에 남아
조용히 빛날 것입니다.

유난히 조용했던 날

요양원에는 유난히 고요한 날이 있습니다.
말수가 줄고, 텔레비전 소리조차 낮아지고,
심지어 바람조차 천천히 불어오는 듯한 그런 날.

그런 날엔, 어르신들의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누군가는 깊은 잠에 들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나는 그 곁을 지키며,
그 침묵을 하나의 언어처럼 받아들입니다.

조용한 날에는 작은 움직임에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물컵을 잡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소리,
숨결과 숨결 사이의 미묘한 떨림.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사진 속에서 다시 웃는 얼굴

더캐슬 요양원에는 벽 한편에 작은 사진판이 있습니다.
언젠가 함께 웃었던 순간들,
명절 행사, 생신 축하, 꽃을 든 어르신의 미소.

나는 그 사진들 앞에 자주 멈춰 섭니다.
그리고 속삭이듯 중얼거립니다.
“여기 계셨지요. 참 예쁘게 웃으셨는데요.”

사진 속 얼굴들은 지금보다 훨씬 생기 있고,
때론 내가 본 적 없는 젊은 날의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흐르고, 시간은 지나가지만,
그 순간의 표정은 사진 속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미소를 오늘 하루의 힘으로 삼습니다.

침묵이 건네는 말

가장 깊은 위로는,
어쩌면 말이 아닌 침묵 속에서 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말을 잃은 어르신이 계십니다.
언어는 서서히 흐려지고,
대신 눈빛과 손짓, 그리고 조용한 숨소리만이 남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오래 머뭅니다.
그 어떤 대화보다 깊고 오래 남는 교감.
그 속에는 미안함도, 고마움도, 사랑도
다 담겨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가장 깊은 능력 아닐까요.
침묵은 때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기억은 흐릅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흐름 속에는 누군가의 얼굴,
따뜻했던 한 마디,
그리고 말없이 건네던 손길이 남아 있습니다.

더캐슬 요양원의 하루하루는
그 흐름을 따라 조용히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고요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살아갑니다.

5장. 내가 머문 자리

보호자의 눈빛

면회 시간,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조심스러운 걸음, 그리고 눈빛.
보호자들은 늘 비슷한 표정으로 찾아옵니다.
걱정, 미안함, 안도, 그리고 사랑.

나는 그 눈빛을 읽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어떤 눈빛은 오래된 죄책감을 품고 있고,
어떤 눈빛은 오늘 하루를 버티며 겨우 여기까지 온 안간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차분하게 말합니다.
“오늘도 평안히 잘 지내셨어요.”
그러면 보호자는 잠시 안도하다가도 다시 묻습니다.
“혹시… 무슨 말씀은 하셨어요?”
“밥은 드셨어요?”

그 조각조각의 대화를 통해
보호자들은 ‘그 사람’의 하루를 확인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물어보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 대답 하나하나에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 질문의 무게를 압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매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를, 따뜻하게 전하려 애씁니다.

오늘도 면회가 많네요

어느 날, 유난히 면회가 많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복도마다 오랜만의 인사, 웃음, 눈물, 그리고 꽃 한 송이.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바삐 움직였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들이 다녀간 자리는, 무엇으로 남을까?’

때로는 눈물이 고인 방,
때로는 작은 선물이 놓인 식탁,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잡고 있었던 오후.

그 모든 것이 이곳의 ‘기억’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늘 있었습니다.
기억을 잇는 사람으로, 그 연결의 고리로서.

어르신의 얼굴에 남은 미소,
그것이 바로 오늘 면회의 의미입니다.
면회는 단지 방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더캐슬 요양원, 고요한 연못

더캐슬 요양원은 작은 연못을 품고 있습니다.
크지 않지만,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반짝이며
잠시 쉬어가기 좋은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나는 가끔 그곳에 앉아 조용히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보낸 수많은 하루들.
언젠가 떠날 사람들, 이미 떠난 사람들.
그리고 아직 여기에 머물고 있는 나.

연못 위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합니다.
“여기, 당신이 머물렀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연못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움, 미안함, 사랑, 그리고 ‘존재했다’는 증거들.

삶은 물처럼 흘러가고,
그 물 위엔 우리가 남긴 흔적이 잔물결처럼 번집니다.

내일도 우리가 있을 자리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창밖의 빛이 붉게 물들고, 복도에 희미한 조명이 켜지면
나는 오늘 하루를 조용히 되돌아봅니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떠올리며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씻고, 걸레를 헹구고,
지나간 자리를 정리합니다.

“내일도 여기 있을게요.”
이 말을 어르신들께 드리지는 않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매일같이 되뇝니다.

이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군가의 하루를 함께 살아낸다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기억이 흐려질 때에도
이곳 어딘가에 남겨질 나의 자리 하나쯤은
조용히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내가 머문 자리에는 따뜻한 말 하나,
작은 손길 하나,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마음 하나가 남기를.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에필로그
잊지 않으려 하지 않아도, 기억은 고요히 흐른다

시간은 흐릅니다.
하루는 지나가고, 계절은 바뀌며, 사람은 떠나갑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말없이 앉아 있던 어르신의 표정,
창밖을 바라보며 흘리던 조용한 눈물,
그리고 내 손을 잡던 따뜻한 그 손끝.

나는 이곳, 더캐슬 요양원에서
잊히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름은 흐려졌고,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마음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떤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삶을, 사람을, 그리고 사랑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은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놓아줄수록 오래 남습니다.
나는 그것을 매일의 일상 속에서 배웠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소리 없이 남고,
가장 진한 것들은 말없이 흐릅니다.

이 책은 내가 만난 하루들의 기록입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계절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끝나지 않은 시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 자리에 있었음을 기억해주는 조용한 증명입니다.

기억은 고요히 흐릅니다.
그 흐름 위에, 우리는 오늘도 마음을 띄웁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합니다.
내일도 이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작가 소개
김석용

사람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는 남자 요양보호사.
서울 근교의 더캐슬 요양원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가며,
매일의 삶과 기억을 글로 남기는 전문 에세이스트.

가족, 계절, 죽음,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따뜻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170편이 넘는 글을 브런치에 연재해온 중견 작가이다.
『고요한 자리 하나』, 『기억은 고요히 흐른다』, 『인생은 여행이다』 등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문장들로 독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성찰의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의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해낸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진심을 놓치지 않는 문장들,
그 고요한 힘으로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는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 곁을 지키며,
흐르고 있는 기억을 붙잡지 않은 채, 다만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 다짐 하나로, 그는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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