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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니크 Jan 12. 2023

교육의 종말 해제

나의 교육관

글을 쓰고 나서 해제라는 사족을 붙일까 말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소설 그 자체로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 생소한 발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사족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교육의 종말 1>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교육 그 자체입니다. 학교나 학원을 없앤다고 해서 교육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교육을 금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교육을 금지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지만, 사교육 1번지 대치동에 모여서 교육을 금지하는 결정을 한다는 점, 정말 다양한 교수 명칭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허황된 구호가 교육에 들어온다는 점 등은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을 금지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교육의 종말 2>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교사입니다.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말합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최근 교육 흐름에서 보면 학습자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수자에 대한 중요성은 간과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설명식, 주입식으로 대변되는 기존 교수자 중심의 수업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입니다. 하지만, 학습자가 중요한 만큼 교수자도 중요합니다.


#6에서 제시한 외계인이 교육을 탐지하는 조건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입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교육(또는 새로운 형식의 의사소통)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금지되고 100년이 지난 시점에 지금과 유사한 시대가 되었지만 더 살기 좋은 시대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도 결국 우리 시대의 교육은 진정한 교육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니 메타버스니 이런 것들이 교육에 들어온다고 교육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은 교사가 체득한 이념을 교과라는 개념을 통해서 전신체적으로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일이 제대로 수행될 때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교육관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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