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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니크 May 20. 2021

오늘날 학자로 산다는 것

'아싸'의 삶으로 나서는 나의 출사표

  이 글의 목적은 오늘날 학자의 삶(life of scholar)이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유는 학자의 삶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길을 가고자 갈망하는 나의 의지와 각오를 선언함으로써 타자의 질문-교수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선택한 학자의 길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길을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대해서 내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 글은 학문의 길(way of intellectual inquiry)로 나서는 나의 출사표(出師表)이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을 학자가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학자가 영어로 ‘스칼라(scholar)’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칼라는 고대 희랍의 ‘스콜레(schole)’를 어원으로 하며, ‘스콜레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스콜레는 ‘학교(school)’의 어원이며, 현대의 용어로 대략 ‘여가(leisure)’로 해석된다. 하지만, 스콜레를 단순히 여가로 해석하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현대의 용어로 여가는 ‘일(work)’과 관련지어 ‘일이 없는 상태(즉, free time)’이지만, 고대 희랍에서 일이란 (반대로) 스콜레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a를 붙여서 오히려 ‘스콜레가 없는 상태(a-scholia)’이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학자의 의미를 좀처럼 알 수가 없다. 학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스콜레의 본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스콜레란 무엇인가? 고대 희랍에서 스콜레는 우주와 사회의 궁극적 진리와 질서를 ‘관조’하는 것이다. 관조는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조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無) 활동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활동이다. 관조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해가 진후에 날개를 펴는 것처럼, 무엇인가 끝난 후에 그것의 사유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스콜레의 의미가 이와 같다면, 학자는 스콜레 하는 사람이다. 학자는 우주와 사회의 궁극적 진리와 질서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또한, 학자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의 원인을 밝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에게서 스콜레의 본래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제 스콜레는 학자나 학교의 어원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것이 가진 본래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스콜레가 모종의 특권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레는 실제적 활동에 도움이 안 되는 쓸모없는 것이며, 특권 계급이 노동하지 않는 근거이며, 따라서 사회 불평등의 원인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고대 희랍의 자유민이나 조선의 양반에게 부과된 사명-일체의 생산 활동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세상을 관조하는 것만 허락된 상태-은 일종의 엘리트주의로 간주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콜레(여가)는 소비할 때만 미덕이다.


  둘째, 스콜레가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고대 희랍의 자유민과 조선의 양반처럼 생산 활동에서 해방되어 스콜레만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늘날 학자는 더이상 우주와 사회의 궁극적 진리와 질서, 존재나 역사의 의미 등을 알고 싶어서 연구하지 않는다. 그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연구 실적을 쌓고, 유행하는 주제를 잡아 연구 논문을 쓰고, 연구비를 수주받기 위해 노력하는 직업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오늘날 직업인으로서의 교수가 아니고서는 학자로서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자 한다. 나 역시 그렇게 교수 임용 시장으로 흘러 왔고,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물론 교수 자리에 미련을 두지 않고 저술과 강의를 하면서 본인의 공부를 해나가는 대가(大家)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기에는 아직까지 능력이 부족하다. 또한 기업이나 연구소 등에서 연구를 하는 길도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공부(여가)라는 삶이 아니라 일(노동)하는 삶이다. 


  왜냐하면, 내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만을 연구할 수도 없고, 트렌드를 쫓아야 되고, 단기성과도 신경 써야 된다. 무엇보다도 그 일을 만족하는 기준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 상사, 독자, 또는 성과 등에 의해 연구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일이지 공부가 아니다. 공부에 있어서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이나 그 과정, 즉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있다(이 문제는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자리에서 그 일만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 자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스콜레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얼마 전에 알게 된 미술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주변인들을 둘러보았을 때, 예고, 미대를 나와서 화가로 사는 사람은 미대 교수나 미술학원 원장이나, 학원 강사가 아니면, 모두 미술과는 다른 일을 하고 산다고 하였다. 실제로 젊은 화가들이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 그리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내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스콜레로 바꾸면, 그들의 삶이 학자의 삶과 완전히 같기 때문이다. 화가로 산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것이다. 즉, 그림을 그린다는 업(業)이 본질이고 화가라는 직(職)은 부수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콜레하는 것의 본질은 공부하는 삶에 있다. 내가 학자로 살고 있다면, 학교에 있는가, 아니면 회사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 학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물론 앞으로도 학자의 길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 직과 업이 일치된 삶을 꿈꾸면서 직과 업이 분리된 삶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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