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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Mar 22. 2019

언젠가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회사의 동기가 공연을 한다고 했다. 무슨 공연인가 했더니 뮤지컬 공연이란다. 그 친구에게 처음 들었을 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매우 바쁘고 신경쓸 것도 많은 회사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 뮤지컬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 굉장하게 느껴졌다. 그 공연에 있는 모두가 직장인이라고 했다. 직장인들로만 이루어진 뮤지컬 동호회인 것이다. 동기로서 힘을 실어주고자 공연을 관람하러 갔다. 많은 이들이 꽃을 사올 것 같아 실질적으로 유용한 케익을 샀다.  공연의 퀄리티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프로가 아닌 이들이 얼마나 잘할까보다는 무언가를 한다는 열정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관람한 결과, 의외였다. 물론 프로에 미치지 않았지만 꽤나 잘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동기가 가장 잘해보이긴 했지만.


문득 과거에 했던 연극이 생각났다. 나도 아주 잠깐이나마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5년 전,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꼭 가고 싶었던 회사의 인턴은 떨어지고 그 해 학기의 학점마저 망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내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치고 올라올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언가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 때 연극만큼은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대중 앞에서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뭔가 오그라들기도 했고 평소의 내 행동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한 기관에서 대학생 프로그램으로 연극 클래스를 모집하고 있었다. 정성스레 지원서를 작성했고, 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어색했지만 한동안 동고동락 하다보니 어느 새 절친이 되어 있었다. 다들 연극에 대한 경험이 없는 대학생들이었다. 우리는 연출가님의 코칭에 따라 열심히 연습했다. 배역에 대한 이해와 대본 숙지, 감정 표출, 호흡법 등 실생활에서도 쓸 법한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역시나 젊은 친구들답게 이 모임에서도 많은 러브라인들이 수면 위로 드러날 법 했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없었다. 사랑에 있어서는 모두가 씁슬한 결말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모임의 본질적인 목적인 연극은 달랐다.


2달 동안 연습했고, 300명이나 되는 관객 앞에서 성공리에 연극을 마쳤다. 연극을 마친 우리는 너무나 신났다. 새로운 도전을 끝낸 나의 마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전보다 더 크나큰 자신감을 얻었다. 함께 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연극으로 도전하자고 얘기했지만, 연출가님이 우리를 말렸다. 연출가님 또한 실제로 연극을 하는 배우이시고,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유명한 외고와 대학을 졸업한 분이셨다. 그러나 우연히 접한 연극에 이끌려 지금까지 하고 계셨고, 후회는 없지만 생활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다. 연극은 정말 매력적이지만, 많은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두 번째 도전은 시작되지 못했다.


당시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연극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팜플렛을 만들어 여기저기 배포했다. 우리의 관객은 대부분 지인이었지만 그 팜플렛을 보고 오는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무료였으니까. 오전 공연이 끝나고, 오후 공연이 시작되기 전 어떤 관객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달 받았다. 누구길래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걸까. 마음 속 의문을 품고 해당 인물을 만나러 갔다. 멀리서 봤을 때 조금 행동거지가 독특해 보였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나눠보니 알 수 있었다. 장애가 있는 서른 초중반의 남성 분이었다. 말이 어눌했고 몸짓이 부자연스러웠다. 본인을 정신지체 장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오전 공연을 보고 너무 인상 깊어서 나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가 맡은 배역은 긍정적이고 활기차며, 어떤 상황에도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니었고, 극중에서 엄청나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다. 굳이 말한다면 소소한 웃음을 담당하는 정도. 그러나 그 분께는 내가 인상 깊었나보다. 공연을 보고 너무 팬이 되어서 인사를 나누고 팜플렛에 사인도 받아가고 싶다고 했다. 몸과 정신이 불편해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참고로 말하지만, 나는 결코 잘생긴 사람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살다가 처음이라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헤어져서 나는 오후 공연을 준비했다.


오후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나의 팬이라던 그 분이 극장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비원이 그 분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다. 혹여나 극이 진행되는 중에 소란을 피울까 염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은 공연장 밖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연극을 보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오후 공연까지 모니터로만 지켜보다가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좋아해준 사람을 제대로 배려해주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 까맣게 잊었다. 오랫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던 추억이었다. 그런데 동기의 공연을 보면서 그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갑자기 가슴 속에 따뜻한 것이 몰려왔다. 봄기운인지, 추억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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