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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맷돌 Nov 21. 2020

청춘은 셈을 할 줄
 모르는 시간에 있다.

                                                   목차

                                         

1. 프롤로그

2. 나쁜 유전자
3. 청춘의 열매

4. 용서하는 청춘 '아, 아버지'

5. 청춘의 사춘기

6. 청춘의 독립




                                                   프롤로그


     어느 날 남편이 큰아이를 가르치겠다고 책상 앞에 앉혔다. 그 모습에 어린 날 나와 아버지가 겹쳐졌다. 언제 화가 터질지 모르는 아버지 앞에서 실수할까 불안에 떨었던 내가 생각났다.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야단치며 가르치는 수업을 버틴 기억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머리 쓰는 일은 마음이 고요해야 가능하다. 억압된 분위기 속 경직된 머리로 상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나의 청춘은 아버지의 책상 앞에서 굳어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채 책상 앞에 불려 나갔던 그 날처럼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책상 앞에 선 것처럼 청춘을 보냈다. 아버지의 생각 틀에 갇혀 숫자에 묶여 살았다.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는 태도는 나를 불편하게 했고 그 기억은 나를 그 청춘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했다. 청춘을 떠올리니 그 속에 나는 비어있었다.


     그런 청춘을 보낸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고 진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를 이어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혔다. 큰아이는 나처럼 숫자를 두려워했다. 큰아이를 나처럼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큰아이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큰아이 역시 나처럼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아이도 나에게 실망을 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랑으로 늘 대하지만 우리는 가르치는 문제에서 배려심이 없었다. 청춘을 돌아보며 아이에게 저지른 잘못을 반성했다. 수학을 못 하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니었듯 수학을 못 하는 것이 큰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존감이 살아났다. 아버지의 책상을 벗어나고 나의 지능은 지금도 진화를 하고 있다.


    글을 쓰며 내 눈 비늘을 벗었다. 보이지 않던 것을 글을 정리하면서 확연히 알게 되었다. 수를 계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내 머리의 감지기가 꺼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직시할 수 없는 혼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쁜 유전자


     아이가 마당에 있는 것을 제방 길에서 보고 상인이 집으로 왔다. 칠판 놀이를 들고 상인은 내게 앞으로 오라고 눈짓을 한다. 플라스틱으로 된 여러 가지 색깔의 기호들과 숫자가 칠판에 척척 달라붙는다. 나는 7살이었다. 상인은 내 나이 정도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셈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떠밀리듯 앞으로 나갔지만 눈치만 볼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나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남 앞에서 내가 가진 가능성을 시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내게 부족한 산수를 붙들고 가르쳤다. 그의 학습은 목적이 없었다. 문제를 내고 나는 답을 써야 하는 노트와의 씨름이었다.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안아 줄 수 있는 정도에 있다. 평상시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는 걸까? 아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힘들다. 기계적으로 문제에 대한 답을 강요하고 다시 짜증을 내고 잔뜩 심각한 얼굴을 들어 날 볼까 봐 두려웠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내는 기억은 아버지의 죄가 아닌 나의 죄로 느껴졌다. 엄마는 어디에 있지? 늘 문제가 터지면 엄마가 내 방파제였다. 머릿속이 멍하다. 아버지는 문제를 풀기를 바라지만 답은 내게 없었다. 문제를 내는 사람만 아는 답을 강요하는 시간은 고문이었다.


    30대 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남들이 다 기대하는 것을 기대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잘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아버지가 꿈꾸는 인생에 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셈 교육에서 손을 뗐다. 산수가 수학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아버지도 어려움을 느끼셨으리라 추측한다. 분수는 아버지에게도 어려운 수학 문제였다.


    숫자 계산에 대해 어려움이 타고난 것인 줄 알았다. 타고난 것은 바꿀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학 시간은 늘 자신이 없었다. 특히 숫자와 관련된 셈을 하는 일은 칠판에 쓴 글자를 그저 받아쓰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경험들은 내가 수학이라는 과목을 마음으로부터 거부하게 했다. 어렸을 때 깨우치지 못한 수학  문제는 어른이 돼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문제를 풀지 못하고 멍하게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며 혼을 냈다. 그때마다 내 머리는 먹통이 되었다. 마치 나뿐 유전자를 가진, 태어나면 안 되는 자식인 거 같았다. 학교에서 수학 시간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급기야 숫자에 대해 문을 닫고 그저 기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늘 아버지의 유전자에 대한 선입견으로 힘들어했다.


    유년의 그 기억이 나를 사유하지 못하게 묶는 밧줄이 되었다.




                                                   청춘의 열매

  

    서른 넘어 낳은 첫째 아이를 키우며 암암리에 아버지의 유전자에 대한 생각을 믿게 되었다. 나도 큰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다. 욕심이 생겼다. 과자를 줄 때는 '하나'하고 과자 하나를 주면서 자연스럽게 숫자에 대한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주입했다. 태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매스컴에서 듣고 2년 터울에 둘째 아이를 뱄을 때는 태교를 위해 셈을 하는 문제집을 풀었다. 배가 당겨오고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면 도움이 돼서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태어날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어린이집을 돈이 아까워 보내지 않겠다던 남편이 갑자기 안 하던 욕심을 부렸다. 6살 큰아이를 집 근처에 있는 사립 유치원에 보냈다. 큰아이는 읽지 못하던 책을 유치원에 다녀와서 밤 10시까지 읽었다. 더듬거리며 무엇에 이끌리듯 열심이었다. 그렇게 가르치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는데 또래들이 책을 잘 읽으니 자신도 해야 하는데 못 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듯했다. 연극을 준비할 때는 영어 문구를 유창하게 외웠다. 유치원에 가더니 달라진 아이를 보고 우리는 보람을 느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서 시간이 여유가 있게 되니 남편은 내가 직장에 다녔으면 했다. 나는 직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내가 일을 나가 있는 동안 큰아이가 열쇠로 문을 열 수가 없어서 옆집에서 도와주는 일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자동문으로 교체하고 아이는 감지기가 있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집을 비운 동안 남편이 전화를 했다. 옆에서 큰아이가 무섭다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뭐가 무섭냐며 야단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결국 한 달 남짓 다니던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집에서 큰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함께 다녔다.


    사립 유치원을 다니고 제법 학습능력이 좋아졌지만 유독 숫자를 큰아이는 잘 따라 주지 못했다. 유치원에서 통장 관리하는 표를 만들었다. 은행에 가서 통장을 개설하고 매달 2,000원씩 저금을 했다. 그 통장을 바탕으로 용돈 기입장을 만들어 더하기를 해나갔다. 그런데 큰아이는 용돈 기입장에 관심이 없었다. 큰아이 숙제인데 나 혼자 도맡아 하려니 화가 났다. 아버지의 유전자에 대한 생각이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절망감까지 들게 했다. 어느 날  큰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경쟁적인 유치원에서의 학습이 무리인 듯했다. 후에 아이가 유치원에서 남자아이가 받는 작은 공을 받고 싶은데 여자아이라서 반지를 받아서 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 벌로 '생각의 방'이라는 캄캄한 방에서 벌을 받았다. 그곳에서 아이는 아무도 오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고 했다. 그 연유로 아직도 큰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한다.


    나는 버거워하는 큰아이를 위해 공립 어린이집을 알아봤다. 보육을 위한 곳이라 아이와 교사가 놀아주고 점심을 먹으면 잠을 재웠다. 큰아이는 안정을 찾아갔다. 나는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같은 곳에 다니게 했다. 큰아이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그래서 작은아이는 내가 관심을 줄 기회가 적었다. 질투 많은 큰아이는 동생에게 골고루 관심을 나누는 것을 싫어했다. 늘 큰아이가 우선이고 늘 먼저였다. 시간도 관심도 선물도 더 많이 갖기를 원했다.


     큰아이는 교과서를 싫어했다. 그래도 만화책은 좋아하니 교과서 만화책을 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교과서라는 글자가 들어갔다고 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기에 걱정이 커졌다. 큰아이에게 시기에 맞지 않게 교육한 탓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내 잘못을 반성했다. 반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런 증상은 줄어들었다. 국어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많이 틀리면 실망할까 봐 집에서 충분한 연습문제를 불러주었다.  틀린 문제는 다시 답을 보여 주고 원하는 만큼 불러주었다. 100점 받을 확신이 생길 때까지...,


    작은아이는 집이 가까운 어린이집으로 옮겼다. 아토피가 심해진 작은아이를 위해 남편은 공기 좋은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작은아이는 한 해를 쉬고 유치원에 들어갔다. 큰아이는 유치원에서 익힌 것을 보육원에서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집에서 큰아이를 돌보느라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는데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순서를 지켜서인지 알아서 책을 읽었으며 틀린 받침 문제를 재해석해서 다음 점수는 갈수록 잘 받아왔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너무 이른 나이에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은 안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어린 시절 수학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큰아이에게 너무 이른 나이에 셈을 가르치고 욕심을 내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아이들에게 재현하고 있음에 놀랐다.




                                             용서하는 청춘 ‘아, 아버지’

  

   

    아버지는 30대 때 자유로운 시간이 없었다. 늘 소들의 새끼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농장을 했다. 60대 때 비로소 엄마의 바람으로 도시 생활을 하게 됐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군대 동기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10년의 긴 세월을 군인으로 있었다. 군대 동기 대부분은 연금을 받았으나 연수를 채우지 못한 아버지는 받지 못한 연금을 한탄하셨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시골에 살 때는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시는 것을 반대하다가 엄마를 따라 주일이면 예배를 보러 가셨다.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사진과 함께 집사 증이 벽에 걸려있었다. 엄마의 능력에 감탄했다. 어느 날 교회가 둘로 나누어지고 당파싸움을 하였다. 본당 목사와 부목사가 나뉘어 다툼했다. 가끔 나도 친정식구들과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교회 마당에서 주일예배를 했다. 나는 엄마가 다른 교회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어렵게 믿음 생활을 했는데 실망할까 걱정이 되었다. 믿는 사람이 본이 돼야 하는 교회가 믿음을 저버린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가족들 몰래 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게 됐다. 시설이 나누어지고 예배를 보는 곳이 나누어지니 화장실을 갈 수 없는 경우가 생겼다. 그게 원인이 됐는지 몰라도 몇 년 후에 전립선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실수할까 봐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만. 엄마는 일주일 내내 교회를 나가는 게 낙이었다. 법적 투쟁을 하고 있는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기도하자면 새벽에도 밤에 하는 철야도 갔다. 아버지는 외로워져서 주변 쓰레기를 정리하고 집을 관리하였다. 그러다 화가 났다. 밥을 식탁에 차려야 드시는 아버지의 입때껏 습관을 거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원에 뇌경색으로 입원하였다. 오빠는 1년을 꼬박 병간호를 하였다. 다른 식구들은 오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가 주고 같이 있다 오는 게 일이었다. 나는 집이 머니 자연히 가끔 얼굴을 보러 갔다. 83세에 아버지는 아플 때나 아프지 않을 때나 변한 게 없었다. 화를 잘 내셨다. 나는 사람이 아프면 개과천선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화내는 것은 습관이고 아버지는 그로 인해 머리가 아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병원에 가서는 머리가 아파서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걷는 연습을 하고 말도 잘하였다. 그래서 예후가 좋아질 거로 생각했다. 오빠는 얼른 집에 가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박차를 가했다. 오빠는 나름 어릴 때 아버지에게 씩씩한 남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빠는 아버지가 이렇게 주저앉아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에 언제 가냐며 가고 싶어 하였다.  

  

     나는 친정에 돌아와 누운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 드릴까 했지만 아버지는 시끄러운 소리에 민감했다. 나는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뇌 활동을 보이는지 셈을 시켰다. 한자리 숫자 더하기를.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가 시도하는 것을 유치한 아이들 놀이로 보는 거 같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셨어요? 하고 물어봤다. 아버지는 잘못했다고 멋쩍게 말한다. 엄마는 그동안 아버지가 살면서 잘못한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잘못했다는 사과를 들었다. 오빠에게 너무 심하게 한 것도. 엄마는 인간승리를 한 것같이 기뻐했다. 자신의 삶이 참고 인내하니 결국 아버지에게 사과를 받았다고 했다. 다 반쪽짜리 인생이라고. 참지 못하고 이혼한 사람은 인생을 완성한 게 아니라고 했다. 미완성인 인생을 살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엄마는 둥근 원을 인생의 목표처럼 얘기한다.


    나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 잘잘못을 묻는다는 게 안 돼 보였다. 다만 내가 아버지 살아생전에 나를 아버지가 원하던 자식으로 증명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아버지는 먹고 싶어도 삼키는 기능을 상실했기에 우리는 식사 때가 미안했다. 냄새에 민감했고 맛을 보고 싶은데 ‘미다스의 손’처럼 먹을 수 없게 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놓고 주인인 걸 잊어버렸고 빈손이라며 아쉬워했다. 나는 돈 봉투를 준비했고 아버지는 얼마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돈을 세며 놀고 싶어 했고 나는 치우지 말고 옆에 두라고 오빠와 언니에게 부탁했다.

  


                                      

                                                   청춘의 사춘기

    

    큰아이는 학교에서 잘 지내지 못했다. 특히 사춘기로 접어드는 중3부터 고2까지가 그랬다. 학교에서 잘 지내지 못하니 급식시간에 집에 왔다. 나는 큰아이를 위해 점심시간을 집에서 맞았다. ‘치즈 돈가스에 라면’ 식당에서 시키듯 큰아이가 메뉴를 얘기하면 나는 해줘야 했다.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 위로를 삼으니 나는 갑자기 누리던 자유가 없어졌다.    


    어느 날은 석식을 또 집에 와서 먹기에 나는 담임에게 전화를 했다. 큰아이는 그런 나를 보더니 화를 낸다. 외출증을 받아서 나와야 되는데 그냥 슬며시 나온 거였다. 쾅, 문을 닫고 나간 큰 아이의 쌓였던 분노가 와장창 깨졌다. 화를 내고 나갈 때와는 달리 너무 온순하게 다시 들어왔다. “엄마, 피 나!” 손을 보니 피가 나고 있다. 양호실에서 간단한 처치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소아 내과에 가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의사가 말한다. 미세한 유리 파편이라 혈관에 들어갈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처치는 소독액을 부어서 씻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늦어 큰 병원을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큰 아이가 괜찮다면 집에 가겠다고 했다. 큰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우리는 하나님 뜻에 맡기기로 하고 집으로 왔다. 그 후 아이는 아픈 만큼 성숙해졌는지 다시 평온을 찾았다.

    

    학교에서는 큰아이가 불안지수가 높게 나왔다는 이유로 자살예방 강좌를 들으라고 했다. 8번에 걸친 강좌였다. 나는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증후에 대해 강사에게 배웠다.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할 때 하는 말 중 행동으로 옮길 때 하는 말이 있다. “나 죽고 싶어.” 주변인에게 얘기한다. 그것은 진짜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도와달라는 표현이라고 했다. 이때 정말 자살을 할지 안 할지 알려면 육하원칙대로 물어보는 게 좋다. 왜 죽고 싶은데? 어떻게 죽을 건데? 무엇으로 죽을 건데? 어디서 실행할 건데? 언제 죽을 건데? 누가 죽을 건데? 나는 학부형들과 서로 대상이 돼서 질문을 했다. 강사는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자살을 예방하자고 했다.  나는 자살예방 강좌에서 들은 질문과 경험을 큰아이와 나누었다. 이렇게 서로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강사는 얘기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학교에서 큰아이는 자살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큰아이는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그런데도 나와 큰아이의 힘겨루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미운 아빠하고 산다는 이유로. 나는 참을 수 있는 어른이고 큰아이는 아빠가 아버지로 아저씨로 보였던 사춘기였다. 

 

    나는 큰아이를 감당하기에 심장이 견디질 못해 아팠다. 청춘의 사춘기에 데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어떻게 대해야 하나 겁이 났다.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 큰아이를 보면 미안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벌을 받으니 죽을 거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붙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씨가 되고 나는 씨를 큰아이에게 심었다. “사랑하는 딸! 어서 와라.” 내 마음에 심고 학교에 갈 때는 “사랑하는 딸 잘 다녀와” 하고 사랑을 딸의 마음에 심었다. 입에 붙을 때까지. 내 인내력을 시험하던 큰아이가 언젠가부터 웃으며 나에게 안겨온다. “엄마, 사랑해요.” 사랑하는 딸이라고 불리니 큰아이는 진짜 사랑스러운 딸이 되어 돌아왔다. 언제 우리가 앙숙 사이였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평온해졌다. 남편은 힘으로 큰아이를 고치려고 했고 나는 사랑으로 품으려고 했다. 숫자에 약한 내가 견딜 수 있는 기한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운 얼굴을 마주하고 진짜 사랑스러운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맘을 담아 불렀다. 내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큰아이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다짐을 해서 불러보게 했다.  


    무력보다 더 강한 건 셈을 할 줄 모르는 기다림이다.

      



      

                                                   청춘의 독립

    

    자신의 주장을 할 때는 남편은 늘 라테 남편이 되었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습관이다. 큰아이는 아빠가 나 때로 시작하는 말을 할 때 슬며시 방으로 사라진다. “아이 지겨워” 들릴 듯 말 듯 입속으로 오물거린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면 “우리 집 애들은 왜 그런지 몰라.”로 시작하는 투정이 끝이 없이 이어진다. 나 같으면 산에 갔다 오겠네! 공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방 한 칸에 다섯 명이 있을 수 없어서 나는 항상 어디든 나가야 했는데 집이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쪽잠을 자고……. 그러다 결론은 “애들이 너무 편해서 그래! 어서 독립시켜야지”로 끝난다.


    남편은 전세로 살면서 흠집이 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큰 애가 방문을 쾅, 하고 닫아 벽에 벽지가 움푹 들어가자 화를 냈다. 내게는 집주인이 보는 앞에서 혼내듯 매를 들었다. 나는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말렸다. 나는 한 번도 남의 집에 세를 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봐라 조금만 잘못하면 혼나니까 알아서 깨끗이 쓰라 하는 선전포고같이 과장된 액션으로 보였다. 앞으로 남편이 집을 사면 집주인보다 더할 거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스친다. 그는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처럼 나를 대할 것이다. “가스는 중간 밸브를 잘 잠가야 합니다. 밑에 가스 밸브만 끄면 안 돼요. 집은 깨끗이 써야 합니다. 흠집이 생기면 자비로 물어내야 하는 거 아시죠.” 끝도 없을 잔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6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나는 내 가구가 하나 없다. 이삿짐센터 차를 대여하면 꼭 짐보다 작은 차를 빌렸다. 그래서 자리가 모자란다고 필요 없는 물건들은 버리자고 했다. 버리는 물건은 늘 나의 물건과 가구였다. 그는 자신의 짐이 늘 먼저였다. 다 본 만화책을 싣는다고 내 가구 하나를 버리더니 이사 와서는 만화책이 필요 없다고 버렸다.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 버린 가구로 인해 최근 남편이 마음을 다치는 일이 생겼다. 집주인이 집을 내놓아서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우리 집에 가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화를 냈다. “집만 깨끗하면 되지 내 세간 살림까지 살 건가? 이상한 사람들이야!” 남편은 나에게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타인의 시선에도 그들을 탓했다. 우리 집은 자신 빼놓고 다 게으르다며 쓰레기를 챙기는 남편의 손에는 작은아이가 엊그제 산 물병이 들려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노력해서 이만큼 사는 것을 긍지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한 번도 남 앞에서 소신을 굽힌 적이 없다. 난 그런 단단한 남편 덕에 인생에 된 맛을 봤다. 늘 내가 벌어야 생활이 되게 주는 생활비를 충당하며 세파를 견뎠다. 어느 날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교회 집사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이 배추장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 줄 몰라 승강기 안에서 생각했다. 내가 배추장사 아저씨랑 사는 줄 아는 것을 보니 내 남편 외모가 그랬나 보다. 그는 20대에 취직하고 그 돈으로 대학을 다니고 생활비를 부모에게 내며 살았다. 그러니 그는 늘 딸린 식구가 있었던 셈이다.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식구만 있고 아프면 보태 줄 식구는 없었다. 자신이 벌지 않은 돈을 달라고 하면 마음속에서 늘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벌지 않는 사람까지 먹여 살려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은 가부장적인 생각으로 바라보지만 돈에 있어서만은 독립을 늘 말한다. “독립해! 게으르면 어떻게 살아? 나중에 손 벌리면 어떻게 하나? 노후자금이 있어야지 나도 살 거 아니야? 애들은 자기가 알아서 독립해야지” 나 이외에 들어가는 돈은 다 비용일 뿐이었다. 그래서 애들 학원비를 내가 부담하는데도 아깝다며 못하게 했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그래갔고 돈만 버린다는 주의다. 비용이 눈에 보이면 너무 차갑고 냉정하다.    

    

    돈에 원수진 청춘은 부모덕을 모르고 독립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부모덕에 돈을 벌 줄 모른다. 나의 친정엄마는 여자가 직장 다니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을 더 좋다고 늘 말했다. 얌전하게 있다가 살림이나 하는 것을 여자의 행복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농장을 같이 일하며 고생한 것이 늘 외할머니에게 민망스러웠다. 아버지 또한 직장을 다니기보다 집에서 일을 거드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내가 직장을 나가 봉급을 받아도 시큰둥했다. 나는 돈 많은 부모님에게 뭘 드려도 생색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병든 아버지가 돈 20만 원에 좋아하는 것을 보니 달라도 너무 달라지셨다. 홀로 된 엄마에게 어버이날 용돈을 드리면 또 엄마도 좋아하셨다. 나이가 들면 다 그렇게 되나 보다. 나는 숫자 관념이 없으니까 남편과 23년을 살았다. 나는 셈을 하고 살지 않았다. 없으면 벌어서 보태며 살았다.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면 가끔 따져서 생활비를 더 타내고 반대하는 교회를 나갔다. 어려서부터 용돈을 모르고 커왔고 시키는 건 무조건 “네” 하며 대답했다. 첫 번째 오빠 다음 언니의 졸병으로 살았다. 입던 옷을 물려받고 시키는 건 따라 했다. 근데 아이들 문제에서는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나는 남편에게 무능력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말이 중요한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너무 참다 보니 모호해졌다. 그래서 하는 일 없이 도서관에 책을 보고 문학 모임에 나갔다. 말 좀 잘해보려고. 그런데 엄마의 성적표는 늘 아이의 성적이다. 큰아이가 앞가림을 못하면 남편은 다 내 탓으로 안다.

  

    나는 이제 남편이 돈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돈이 떠나면 나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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