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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맷돌 May 31. 2024

장자의 인시와 위시

생활 속에 이론접목

   강신주 철학자가 티브이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장자를 연구해서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도가의 대가 장자는 무슨 말을 했기에 강신주 철학자가 다루고 있는지 궁금했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에 사람인데, 유교의 공자, 맹자처럼 도교에 철학자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덕목은 무엇일까? 옛 어른의 이론이 이 시대에 필요하니까 이렇게 티브이 프로그램까지 나온 거겠지,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예전에 그의 저서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도서관 동아리들과 토론에 참여했어요. 미스메디어가 판치는 광고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광고는 돈이 되니까 인기 있는 드라마에 스폰서로 나온다. 우리는 그들이 리모컨을 발명한 사람을 원망할 거 같다. 재밌는 프로그램 시작과 중간에 끼어드는 광고를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리모컨은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까지 다른 채널을 만지작 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광고는 진화했다.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더 화려해지고 우리 눈을 끌기 위해 유명인을 끌어들인다. 그들을 볼 때, 멋지다,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멋있는 차를 몰고 약속장소에 나가는 나, 부유한 아파트에서 커튼을 여는 나, 파티가 벌어진 상에서 맛있을 것을 탐하는 나. 노후걱정 없는 미래를 사는 나를 꿈꾸게 한다. 생각 없던 욕구가 일어난다. 현실에 나와 광고 속 주인공과 동일시된다. 배고프지 않은데 거짓 식욕이 생기고 사고 싶지 않았었는데 차나 아파트나 안마의자를 소비를 하고 싶어 진다. 그 이면에 우리는 광고주들에 노예가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괜히 상처받지 말라고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상대평가로 생긴 성적표처럼 우울하게 한다. 사화적 성취감까지 비교당하는 것이다. 큰 괴리감이 생길수록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생긴다. 우리는 광고를 차단할 권리가 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다. 우리에 욕구는 조작된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스템에 속은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삶을 혁신적으로 꼬집었던 그가 오늘은 무엇을 들고 나타났을까? 궁금했다. 우리의 보통의 삶은 위시라고 했다. 평범한 삶은 그가 말하는 위시다. 위시는 보이는 삶이다. 우리의 공통대화다. 우리가 이제 것 배운 방식이다. 그의 예는 미인과 추녀를  들었다. 우리의 기준은 여자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늘 미녀인지 추녀인지 구분하는 버릇이 있다. 미녀가 아니면 추녀이고 추녀가 아니면 미녀이다. 속된 말로 이 시대는 미녀의 죄를 묻지 않는다. 예쁘면 그 죄가 속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성형외과에서 여자들은 목숨을 건다. 조그만 차이로 미녀가 될 수 있었는데 추녀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게 중에는 성형부작용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환자가 된다. 정말 그녀는 미녀가 되길 바랐을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 자기만족시대라고 하지만, 외모로 무임승차하는 욕심은  누가 만든 것일까? 예쁜 모델에 현혹돼서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수술대에 자기를 맡긴 것이다.


  그다음 강신주 철학자가 예로 든 것은 냉장고의 비유다. 요리사는 냉장고를 열고 자기가 원하는 재료가 없네! 하고 요리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이 위시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의 삶이다. 재주 없는 놈이 연장만 나무란다는 옛말이 있는데, 해보지 않고 도구만 탓한다는 말이다. 할 의욕이 없을 때, 우리는 탓을 찾는다. 도에 도달한 사람은 냉장고를 열었을 때, 재료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요리를 있는 것을 가지고 뚝딱, 해낸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다음 그의 예는 인간의 관계를 들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기 전에는 외모가 중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면 미녀와 추녀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위시의 삶에서 인시의 삶의 전환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도인 것이다라고 작가는 결론을 지었다. 사귀기 전까지 우리의 기준은 사회의 기준으로 본다. 사회에서 배우고 대화한 상식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몰아의 경지에 다다르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그게 도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도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쯤 있을까? 요즘 가끔, 길을 가다가 좋은 말을 듣는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 한다. 그러면, 괜히 우쭐해져서 내가 인상이 좋지! 하고 긍정에너지가 생긴다. 그다음, 멘트는 도를 아십니까? 였다. 교회에서 들은 지식으로는 그들을 따라갔다가 산에서 나올 수 없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는 소릴 들은 거 같다. 나는 차가워진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럼, 우리 생활에 도는 어디에 있는 거지? 친구와의 우정에는 어린 시절 같이한 추억이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보고 싶어 동창회에 물어물어 찾아갔다. 얼마나 변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어린 시절 구무지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사심 없이 어릴   친구가 그리웠다. 거기에는 부자인지, 가난한지, 못났는지, 잘났는지,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을 사랑했었다. 고만고만한 애들이 시골 기를 수다를 떨며 걸어가고, 집에 가서 밥을 같이 먹고, 콩서리를 해서 불에 그슬려 먹다 가방을 태우고,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고 메뚜기를 잡고, 강가에 물고기, 조개를 잡아서 연탄불에 구워 먹으며 즐거워하던 일들이 먼저 떠올랐다. 내 사랑하던 시절 함께 했기 때문에 그 애들은 다 내애들이 되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다.


    어느 날 페스트 프드점에서 콜라가 리필이 되던 때가 있었다. 그 바람에 마냥 신났다. 그 페스트 푸드점은 인기를 끌었다. 어차피 한잔 마시고 나면 더 먹을 수 없는데 공짜라면 기분이 좋았다. 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자유로움, 편안함이 기대를 충족시켜 줬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피자집에서 한판을 다 먹을 수 있으면 더 준다는 가게가 집 근처에 생겼다. 어차피 한판을 먹을 수 없으면서, 주인의 과잉 친절에 힘입어 나는 세 쪽까지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더 먹으려니 고역이었다. 주인은 옆에 서서 진심이 묻어나는 표정을 살피며 역시, 힘들겠네 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했다. 한판 더준대도 못 먹네! 했다. 이 시대는 막 퍼주기, 막 먹어내기 판으로 흘렀다. 고기무한 리필집이 생기고 큰애와 같이 갔다가 미리 구워온 수북한 돼지고기 목살을 보고 식욕이 뚝 떨어졌다. 불에 지글지글 거리는 고기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게 상술인가? 식어빠진 고기, 그것도 수북하게 싸놓아서 더 많아보였다. 더 먹었다간 배가 걱정이 돼서, 도전을 포기하자 했다. 사람들은 돈값보다 더 보상받길 바라고 업주들은 그 기대에 부흥하면 장사가 잘될 줄 알았다. 그러나, 돼지가 아닌 이상 소비는 한도가 있고 장사는 막을 내렸다.


   삐뚤게 보기가 유행하고, 일상을 비틀어 평범한 말들에 반대로 생각했다. 시어는 특이해야 하고 시제 중 떠오르는 일상언어를 나열한 뒤 제하고 나머지 생경한 단어들을 취한다. 사람들은 이제 것 많은 시에 노출됐고 식상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다. 더 독하고 강하고 그런 메시지와 대사가 광고주와 드라마 주인공과 개그맨들이 사용했다. 어느 날 국물맛이  끝내줘요. 또 어느 날은 죽여워요로 더 말이 과격해진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힘들 때 하는 말 중 아이고! 아이고! 하지 않나? 우리는 무의식 중 나 죽내!  나, 죽내! 하고 살아냈다. 죽을 것 같이 농사일을 힘들게 하고 툇마루에 걸터앉아하는 말이다. 이런 심리를 광고에서는 간파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옆에서 듣고는 화를 내었다. 말을 줄였지만, 여자가 죽여준다는 말을 하는 건 듣기 거북했던 거 같다. 그런데, 이렇게 광고대사가 버젓 시 대낮에 끝내줘요, 죽여줘요 하니 할 말이 없다. 거봐, 저기 티브이에서도 하잖아! 위시의 기준이 누군가의 의도대로 변하고 있다.


    사용자들이 꿈꾸었던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의 <선물>이란 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에게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지, 어필했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의 힘>은 피곤에 지친 현대인에게 긍정적으로 살으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진흙이 긍정의 힘이 있는지, 나는 처음 알았다. 밟혀서 발자국을 남기는 진흙처럼 우리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잘 모르는 것에 사람들은 관대하다. 이해 못 하면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래야 중간이라도 간다는 위시의 말처럼 우리는 입 꼭 다물고 모르는 문제는 신처럼, 종교처럼 그냥 걸러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위시의 삶을 살다,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면 포용할 수밖에 없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 있다 왔나 물을 필요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신분의 격차와 지식의 격차로 시작되는 경계에서 그들의 언행에 따라 판단한다. 고 그름의 잣대는 윗물에서 아랫물로 흐른다는 위시의 논리대로 본받는다. 마음에 안 들면 툴툴거릴지언정 시대를 거스를 재간은 없다고 느낀다.


   우리말에 곡해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똑바로 해석해서 들으라는 얘기다. 잘못 들으면 다툼이 일어나는 가까운 사이에 하는 말이다. 네 생각해서 진심 어린 충고를 하니 새겨들으라고 한다. 그러니, 허투루 들으면 화가 날 수 있는 내용이니,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주로 연장자가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할 때 쓴다. 내입장만 생각하면 이익이 되지 않는 타협해야 하는 말이다. 다 같이 살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는 괴변론에 가깝다. 다수에 대한 통제는 누군가의 대리로 나선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무리에는 꼭 대표가 있고 그위도 그위에도 그랬다. 개인행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다이어트 시대에 먹방은 그들의 욕망을 대신한다. 일본에서는 식욕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먹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먹방유투버를 하는 사람에게 후원자는 먹이 사냥을 시키고 돈을 지불한다. 후원금조다. 얼마나 먹고 포기하나? 내기를 하는 것이다. 매운 단계가 진화를 해서 1단계부터 5단계로 늘 어난다. 망가지는 사람을 즐기는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임처럼 사람을 사는 풍조다. 직접적이고 자극적이고 쾌감까지 대리만족을 준다. 집단심리까지 가세를 하면 이것은 경매 수준이다. 돈을 더 거는 후원자의 주문을 들어주는 순이다. 이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위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왕따, 따돌림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친구 사귀는 게 서툰 위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시의 우정을 보는 건 괴로울 수 있다. 나는 친구를 사귀었다. 그녀는 뚱뚱했고 눈꼬리가 올라가서 인상까지 좀 싹수없어 보였다. 걸을 때는 팔자거름에 가슴까지 출렁거려서 가던 남자가 뒤돌아보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애인이 있음에도 뒤돌아보는 이유를 한참 생각했다.


    어느 날 다른 친구가 내가 늘 붙어 다니는 친구는 독선적이라고 했다. 밖에서 본 그녀는 지갑에 돈을 가득 넣고 다니고 길에서 잘 사 먹는다고 했다. 새벽에는 남자가 그녀에  자취방에서 나오더란 얘기까지 털어놓으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믿지 않았다. 나는 늘 웃으며 나를 어깨 동무하고 다니는 그녀가 좋았다. 외롭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조곤거리는 그녀의 일방적이 말이 재밌었다. 그런데, 다시 그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늘 나와 있을 때는 돈을 쓰지 않았다. 실하고 싱싱한 딸기를 갔다 주곤은 나중 나에게 돌아오는 거는 물이 나오는 잔챙이 딸기를 생색을 내며 주는 것이었다. 생일날에는 필요 없는 것을 받을까 봐 콕, 집어 사달라고 할 정도로 자기 생각을 내보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걷히니 감춰졌던 상식적인 그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극에서 보면 의리를 중시하는 시대가 있었다. 물론 서양영화에서 의리를 볼 수 있다. 대부, 대모의 풍습이다. 아기가 클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부모노릇을 하겠다고 아기부모대신 앞에 서약하는 것이다. 서로 의기투합하면 피를 나눈 형제처럼 의형제가 되었다. 부부의 연을 맺으면 그 의리가 작용했다. 아플 때나, 슬플 때나 백발이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집안에 의리로 어릴 때 정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의리를 저버리면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처럼 한을 품은 귀신이 돼서 되갚아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아무리 현대에 산들 우리는 권선징악을 좋아한다. 누군가 꽤 심한 생각이 들면 천벌을 받을 거야 하고 상대 얼굴에 토해낸다. 어쩔 수 없는 억울함을 풀 수 없을 때는 점집에 다닌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는 하느님을 찾는다. 좋은 결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자기 맘에 안 들으면 돈을 얹어 되게 한다. 부적을 쓰든 굿을 하든 한다.


  도에서 말하는 위시에서 인시로의 삶은 사랑이다. 인문학에서 우리는 사람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면 사회는 더 편해지고 더 유익해진다. 사람에 관심보다는 물질에 따르는 이해관계가 중심이 되면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이 생긴다. 아이큐가 높은 집단의 지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주장하고 학식과 지식이 숭상받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분법으로 개, 돼지란 말을 사람에게 쓰는 지도자가 생긴다. 마치 농사해서 쓸모없는 사람은 아내야 다른 돈 되는 실한 것들이 잘 자란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란 서로 돕고 모자란 것을 감싸주고 나누어 먹던 시대가 있었다. 사회는 그런 끈적끈적한 관계를 원해서 써먹었다. 그런데, 영리 추구하는 회사에서 구조조정이니 합병이니 세포 분열이 일어나며 우리는 잉여인간을 생성해 냈다. 가족 중 남는 인간은 없다. 공생관계인 가족에게 서로 의지하고 도와줘야 하는 일원일 뿐이다. 사화는 정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세부류로 운영하며 인금차별을 해서 영리를 추구하고 있다. 가족끼리 차별하면, 비교하면 살인이 일어난다. 눈에 불이 난다. 똑같은 자식인데 누구는 잘 대해주고 누구는 찬밥이 야하고 불복종하게 돼있다. 돈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 밥그릇 싸움이 생기고 전문직이 비전문회 될까 철통밥통 고수를 위해 길거리에 나온다. 임금이 신분이요, 인간레벨을 구분 짓는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기계가 일반화되고 최첨단 기계가 들어온다면 손기술이 인공 지능로 벗을 운전하는 기술자를 양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인구 중 85프로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느끼는 지능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신이 선물한 지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노력해서 천재를 따라갈 수 없는 위시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장자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다. 강신주 철학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제야 사람이 보인다. 여자가 보인다. 추녀인지 미녀인지 중하지 않다. 부자인지 가난한지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지, 비장애인지 보이지 않는다. 엄마마음이 된다. 예쁜 짓 하다 미운짓 해서 미워졌는데, 그것이 사회의 잣대였다. 내 본마음을 찾으니 늘 사랑하고 있었다. 위시의 삶에서 벗어나는 아픔을 겪으며 자식이 소생하고,  한 사람으로 사회에 올바로 설 수 있게 이기심을 내려놓게 되었다. 리필하는 시대라고 사랑이 리필이 되나요? 하는 말이 화재가 되었다. 사랑의 배터리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지치고 힘들 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한때, 길에서 사람들을 안아주는 이벤트를 보여준다. 자신을 죽이는 시대에 자살률 1위라는데, 누가 그들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렸나? 이 사회에 좌절하게 했나, 그들도 사랑을 갈구했다.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1 급수에서만 살던 물고기처럼 탁류가 된 사회에 살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물들지 못해 몸부림쳤을 사랑이란 산소를 마실 수 없어 숨 쉴 수 없지는 않았을까?


   어느 날 나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할 수 있냐는 한 신학생의 말이 정당하게 들렸다.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기 벅찬가 보다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엄마로 사는 나는 자식한테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는다. 벗어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육아전쟁으로 힘든 엄마에게 이 시대가 주는 말이다. 감옥으로 생각하면 죄인처럼 고통받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내일이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임금 받은 만큼 하라고 압박을 하지만, 누구의 지시가 아니라 내일이다 생각하면 내가 생각하는 디테일한 일까지 하게 돼있다. 하루만 살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일터를 내터처럼 가꿔야 나중에 더 편해지기 때문이다. 위시의 삶은 도의 입구에 있다. 그 문을 열려면 사랑해야 한다. 불평, 불만의 기준은 어쩌면 우리의 상식선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희생 없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 일, 내 사람, 내 고장, 내 나라로 나를 붙여놓으면 다 이해되고 만다. 받아들이냐? 그렇지 안 나는 그 사람 그릇크기에 달려있다. 내가 받아질 것인지 아닌지는 섬김에 있다. 누군가 나를 기분 좋게 칭찬하고 예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필요한 걸 챙겨주고 보살펴주면 좋겠다. 돈 받지 않고 돈 들지 않는 이윤추구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면 좋겠다. 그게 사랑이라면 기부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도와주는 마음이 사랑이고. 모자란 부분을 감싸주는 게 사랑이고 도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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