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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Aug 12. 2016

블루베리 파이가 팔리지 않는 이유

이별의 문제점은 당신이 아니에요

길을 걷고 있었다.

왜 그 길이어야 했냐고 묻는다면 친절하게 답을 할 수 있을 만큼 

그길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조금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한 곳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서

길이 뻗어있는 대로 발이 가는 대로 나아갔어.


한 두 번은 와봤던 거 같은데,

언제 누구와 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거리를 

천천히 걷다가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졌어.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 휩쓸려 버렸거든.


그러니까 나는 반대방향에서 

네가 걸어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단 거야.


재빨리 몸을 숨기거나 옷차림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내 앞엔 네가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짧은 몇 초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어.


정지화면 같았던 그 순간은 고작 두 걸음뿐이었는데

너와 멀어질수록 끝도 없이 길어지는 거 있지.


그리곤 너와 꽤 멀어졌다 싶을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다가

한 옷가게 쇼윈도 앞에서 참았던 숨을 내뱉듯이

턱 하고 멈춰서 버렸어.




너한테 비춰질 내 모습

나는 그게 가장 먼저 걱정됐던가 봐. 


유리 속에 나는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해 보이는 건지.


감지 않은 머리에 눌러쓴 모자

굽 없는 운동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


오랜만의 재회인데 나는 참 볼품없었어.

그리고 더 최악인 건 그런 내가 혼자란 사실이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거 같았어.

나는 꽃도 아닌데 마지막으로 남은 꽃잎을 떨구는

꽃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게 조금 우습지.


어쩌면 나는 그 꽃잎이 두장이 되고 세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아주 조금씩 시간이 흘러서 그리움이 한 겹씩 쌓이다 보면 

언젠가 한송이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 약점과도 같았던 너에 대한 감정

꽃잎 한 장 크기만큼은 그래서 꼭 쥐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 떨어져 버렸어.


습관처럼 쥐고 있던 게

사라져 버리는 거니까 처음엔 아프더라.

근데 한편으론 시원했어.



내가 좋아하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에

카페를 배경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어.

카페 주인인 남자는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해.


매일 밤 가게가 마칠 때가 되면 

치즈 케이크와 애플파이는 다 팔리고

초콜릿 무스도 거이 다 팔리는데

블루베리 파이는 손도 안 댄 채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역시 맛이 없었던 걸까 

여자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해.

블루베리 파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다만 사람들이 고르지 않을 뿐이라고.


너와 함께 걸어가던 그 사람이 없었대도

너를 돌아보게 만들 만큼 내가 변했대도

아마 너는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야.


더 이상 네가 날 사랑할 수 없는 건

질려버린 내 모습이 아니라

내게 질린 니 모습이니까.


떨어진 꽃잎도 

남겨진 블루베리 파이도

어떤 잘못이 없단 걸 우린 가끔 잊고 사는 걸지도 몰라.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My blueberry nights. (2007) , 왕가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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