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는 100-32

#책과강연#백백글쓰기#14기#길치#방향치

by 향기로운 민정

오늘 내리는 비는 궂은비가 맞나 보다.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회색빛 도시에도 비가 내린다. 마음이 꿀꿀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올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나선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길이 낯설다. 어쩌면, 다른 사람은 이미 길을 익혔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났다. 길치, 방향치라는 꼬리표를 아직 떼어 내지 못했다. 비를 맞고 걷다 보면 우울한 내가 깊은 동굴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시작한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하며, 지금 나를 돌아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고 걷는다. 음악소리가 요란한 대형 매장에 들어가 본다. 시장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걸음은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킬 뿐 위안이 되지 않는다.

경쾌한 음악이 나를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들어간다. 언제부턴지 음악은 귓전으로 흐르고 내 머릿속은 침울한 기억을 되새김하며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있다. 오히려 지하 100층까지 끌려 들어가는 우울모드다. 책을 보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는다. 서점이 없는 건지, 내가 못 찾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바로 앞에 보이는 대형 쇼핑몰에서 아이쇼핑에 몰두한다. 기분이 좋아지지 않지만 더 이상 깊은 동굴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하고 집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밖으로 나온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건물의 네온사인 빛과 도로의 자동차 불빛이 엉켜서 현란하다. '여기가 어디? 난 누구?' 혼란이 시작된다. 왔던 길은커녕, 방향을 못 찾겠다. 모든 것이 처음 본 듯하다. 어느 길이 집으로 가는 길인지 못 찾겠다. 핸드폰을 열어서 지도를 본다. 집 주소를 찍고 내비게이션을 시도한다. 안내를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경로 이탈이란다. 다시 메인 화면으로 돌아와 그림만 보고 방향을 잡기로 한다. 방향을 잡고 걷다가 갈림길 앞에서 갈 길을 못 찾겠다. 계속 반대 방향으로 왔는지 시간이 늘어나 있다. 휴.


길을 물으려고 사람을 살핀다.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은 발길이 바쁘다. 통화하며 지나가는 사람은 안될 것 같고, 성인 남자는 왠지 무서워서 안되고, 학생은 이어폰 꽂고 있는 것 같아서 안될 것 같다. 인상이 순수한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으려고 하다가 잡을 수가 없다. 우리 집 위치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 놓친다. 고민을 하다 보니 집 근처 전철역까지 가면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버스를 타자. 버스가 있음을 불현듯 생각난다. 정류장을 찾는다. 정류장도 안 보인다. 없는 건지, 못 찾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정신이 가출했나 보다. 결국, 전화를 해서 지인 찬스를 이용해서 겨우겨우 집까지 찾아왔다. 환경을 바꾸면 우울함에서 헤어 나올 것 같았던 기대감은 이미 사라졌다. 피로감과 두려움의 동굴에서 빠져나온 안도감이 우울함을 잊게 했다. 길치, 방향치가 바깥에 갇혀버렸던 못 말리는 나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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