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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Aug 24. 2022

예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놀이터에 전투복을 입고 갑니다 

예쁜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놀이터에 입고 갈 옷을 골랐다. 동네 나갈 때 즐겨 입던 회색 츄리닝 바지는 선택지에 없었다. 발목까지 오는 은은한 광택이 나는 카키색 주름치마를 입기도 했고, 친구들과 바캉스 갈 때 입으려고 사둔 귀여운 오버롤 바지를 고르는 날도 있었다. 타이트한 연청바지에 출근할 때 즐겨입던 푸른색 셔츠를 걸쳐입고 나가기도 했다.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놀이터에 나가면 늘 누군가가 있었고 자주 마주치는 아이와 부모를 의식하게 되면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게 됐다. 평소의 나는 동네에서 아는 이웃을 마주치더라도 내 상태가 어떤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가 닿을 집근처 놀이터에 가는데 놀러갈 때 입는 옷을 고르고 가끔은 입술에 뭔가를 바르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나가도 남들 눈에는 크게 다를 것도 없을텐데 말이다.


이십대 때보다 옷 쇼핑에 집착하고 피부, 머릿결 관리에 신경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예쁜 엄마’를 갈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했지만 욕구가 크진 않았다. 이십대 때는 교복에서 갓 벗어난 후 얻은 자유를 만끽하는 정도로 꾸미고 다녔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무난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모를 관리했다. 또래에 비해서는 덜 꾸민다라거나, 치장에 관심이 없어보인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던 걸 보면 꾸밈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예쁜 엄마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은 출산 전 내 모습을 점점 잃어가게 되면서다. 출산 후 겪은 신체 변화는 점점 외모 비수기로 나를 끌어당겼다. 임신 전 체중으로 돌아온 날 신나게 청바지를 입어봤다가 벌어진 골반에 멈춰선 허리춤을 잡고 아찔해했던 기억이 있다. 샤워를 하던 중 머리카락이 욕조 배수구를 틀어막아 발목까지 차오른 목욕물을 보며 ‘출산 후 탈모’의 굴욕을 제대로 겪어보기도 했다. 아마 엄마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일이다.


체력과 시간의 한계도 문제였다. 맨 얼굴에 옷만 입었을 뿐인데도 아이와 외출할 때는 시간이 평소의 두배 이상 걸렸다. 옆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계시면 조금은 낫겠지만 얼굴에 뭐 하나라도 더 찍어 바를까 하다가도 아이가 옆에서 칭얼대면 ‘그냥 대충하고 나가자’하는 유혹에 빠져 그냥 나가게 됐다. 어떤 날은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방금 샵에 다녀온 것처럼 한껏 꾸미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들어오는 엄마들을 마주친 적이 있다.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있는 걸까, 원래 꾸미는 데 재능이 있는 걸까, 엄청나게 부지런해서 새벽부터 준비하는 노력형인걸까, 엄마가 아니고 이모인가.’ 당시 오만가지 물음표가 머리를 휘저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몇명의 예쁜 엄마들이 있었다. 삼촌과 결혼하기 전부터 예뻤던 둘째 외숙모는 쉰을 넘어선 지금도 아름답다. 배우처럼 특출난 미모는 아니지만 늘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신다. 청첩장을 전해드리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 청바지와 흰 티셔츠에 자켓을 입고 청초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둘째를 출산한 회사 선배도, SNS에서 알게된 어느 여성 사업가도 예쁜 엄마들이다. 이들은 분명히 타고난 매력도 있겠지만 여러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미의 세계를 구축해온 듯 했다.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면서 지금까지 그 매력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마치 성공한 사람의 아우라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결을 물어보고 싶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비결이 대부분 그렇듯 언어화되는 순간 맥없이 진부해져버릴까봐 매번 망설이곤 했다. 


내가 분석해본 이들의 공통점은 외모에 엄마의 흔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연예인 만큼 뛰어난 외모를 갖춘 건 아니지만 엄마가 되기 전, 한 여자로서 세상을 유유히 누비던 때의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엄마같지 않은 엄마가 ‘예쁜 엄마’의 비결인 것이다. 출산 전 미모만 유지해도 예쁜 엄마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쉬워보이면서도 어려운가. 


출중한 외모를 갈망해 성형외과 문턱을 서성대는 욕망이 아닌 출산 전 내 모습으로 돌아가 살고싶은 최소한의 욕망. 지난 일 년간 이 최소한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좀 많이 벅찼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여유가 생길 거라고 기대했지만 점점 더 체력이 한계에 부딪혔고 좌절감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어릴 적에도 꾸미는데 소질이나 흥미가 덜 했듯 '예뻐 보이는 일'은 맞지 않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최근 놀이터에서 한 아이의 엄마의 모습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집 근처에 있는 꽤 큰 놀이터였는데 그날 따라 날씨가 좋아 엄마와 아이들이 많았다. 모두들 캐주얼한 차림으로 오긴했지만 손목이나 귀에 반짝이는 악세서리를 하는 등 은근히 신경을 쓴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도 있긴했지만 대부분은 팔짱을 끼고 아이를 지켜보거나 이웃 엄마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무리들 사이에서 혼자 눈에 띄는 엄마가 있었다. 상의와 하의를 모두 짙은 차콜색으로 입고 모래밭에 주저앉아 아이와 놀고있었다. 편안한 요가복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스님옷과 흡사하기도 했는데 내 눈에는 그저 아이와 신나게 놀기위한 전투복으로 보였다. 새까만 머리를 질끈 묶고 모자도 쓰지 않은채 아이와 열심히 모래를 파고 쌓고 부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아이와 함께 서로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고는 모래밭에 무심하게 던져놓은 검정색 백팩을 매고 아이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그 엄마의 모습은 잠깐이었지만 한편의 명품 브랜드 캠페인을 본 것처럼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화려함이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겉모습에서 열정, 자유, 지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아름답기까지했다. 그런 엄마 옆에서 노는 아이는 별다른 표정은 없었지만 편안해보였다. 


그동안 옷을 잘 차려입고 놀이터에 다녔던 나는 그날 무엇을 입었는지, 또래 엄마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지는 기억나지만 아이와 어떤 교감을 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놀이터에서 본 인상적인 두 모자는, 아이는 물론이고 그 엄마도 아이와의 놀이에 온몸으로 몰입했던 순간을 오감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 이는 얼굴에 어른대는 기미나 주름도 아랑곳않고 마주한 세월을 살아나갈 것이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씬한 자태를 뽐내면서 얻는 자기만족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모에는 힘은 빼더라도 아이와의 시간에 완전히 몰입하며 얻은 기억은 나를 더 나은 엄마에서 그치지 않고 더 성장하는 인간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제는 나도 아이와 모래밭을 뒹굴 전투복을 구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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