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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Aug 09. 2022

풋풋한 여름의 맛, 아오리

외할머니를 추억하며

지난 주말 한인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과일 코너에서 아오리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시절 체질이 바뀐 이후로 사과를 먹으면 알러지 반응이 있어 어디서든 사과를 보면 못 본척 지나친다. 이번엔 왠지 연두빛 광채를 뿜어내는 아오리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 해 두어개 장바구니에 담았다.

아오리는 여름 과일이다.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만든 품종이라 아오리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다 익으면 붉은색을 띄는 품종이지만 익기 전에 낙과가 심해서 국내에서는 연두색일 때 출고한다. 아삭하고 풋풋한 식감이 매력있지만 저장기간이 매우 짧아서 늦여름에 아주 잠깐 맛볼 수 있다. 아오리 마니아들은 이 시기만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단다. 싱그러운 연두색에 풋풋한 식감, 외부 환경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사춘기의 아이들과도 많이 닮았다.


나는 아오리하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어린시절, 외갓집은 나와 사촌들의 아지트였다. 여름방학엔 기다렸다는듯 외갓집에 우르르 몰려가 숙식을 해결하곤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간식으로 종종 꺼내주시던 과일이 아오리였다. 수박, 참외, 자두, 복숭아 등등 여름은 과일의 계절인데 외갓집엔 늘 아오리가 있었다. 가끔은 또 아오리냐며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께서 아오리를 참 좋아하셨던 것 같다.


가끔은 껍질째로 와구와구 베어먹기도 하고, 할머니가 예쁘게 깎아 가지런히 접시에 올려둔 것을 포크로 깨작깨작 먹기도 했다. 그렇게 아오리를 먹고나면 한동안은 입안이 풋내로 가득했다. 나는 아직도 그 냄새를 여름의 냄새로 기억한다. 아주 뜨거운 여름날, 사촌들과 한바탕 찬물 목욕을 한 뒤 선풍기를 틀어놓고 대자로 누워 입에 하나씩 물고 웃고 떠들었던 시간.


주말에 아오리를 산 것은 아마 외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에 오고 난 후 부쩍 외할머니 생각이 자주 난다. 외할머니는 지난해 초가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오랜시간 요양원에 계셨었고, 지방 멀리 계시다보니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그런지 나는 많이 슬퍼하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를 돌보는 데 내 모든 육체와 영혼을 쏟아넣고 있었기에 슬퍼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핑계로 들릴 수 있겠으나 돌이켜보면 당시 정말로 나에게 슬픔은 사치였다.


당시에 나는 생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생리전증후군에 해당되는 모든 증상을 갖고 있었다. 불안, 초조, 짜증, 이유없는 적개심, 집중력 부족 등등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이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됐다. 아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두려워서 나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사는 환경이 바뀌고 나니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미국에 온 지 수개월 만에 가장 먼저 외할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보다는 할머니와의 좋았던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나를 가장 예뻐하셨던 건 아니겠지만 나는 외할머니를 조부모님들 중에 가장 좋아했다. 부모님의 잦은 싸움에도 내가 밝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 덕이다. 내 삶에서 따뜻했던 기억들을 만들어 주신 분, 어린 내가 마음껏 기댈 수 있도록 해주신 분. 돌아가셨을 때 제대로 떠나보내드리지 못해 너무 죄송하고 아쉽지만 할머니와의 추억을 자주 떠올리는 것으로 그 빚을 갚으려한다.


아오리사과는 오늘 오후 딸아이에게 깎아주려고 한다. 할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예쁘게 깎고 가지런히 접시에 담아 첫 아오리 사과의 상큼함을 맛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여름마다 아오리를 깎아주면서 아이의 여름도 싱그러운 풋내로 가득한 기억으로 그려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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