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좀 쉬자!
엄마로서 스스로에게 흠칫하는 순간이 늘고 있다. 주로 엄마로서의 자아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훅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얼마 전 저녁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자고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탁 위 저녁상을 그대로 둔 채 정신없이 밖으로 나갔다. 제법 몸이 다부져진 첫째는 나보다 앞서 킥보드를 타고 달렸고 나는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같이 가야지!’라고 열 번은 소리치며 첫째를 쫓아갔다.
산책 한바탕하고 집에 들어와 팽개쳐둔 저녁상을 치우고 티비를 보고 있는 첫째 옆에 앉았다.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첫째가 이번엔 딸기를 좀 씻어달란다. 티비를 보면서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조금만 있다가 주겠다고 기다리라고 했더니 싫다며 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다.
“엄마도 좀 쉬어야지!”너도 이제 세 살, 한국 나이로 네 살이니 어느 정도는 알아듣겠지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전에는 아이에게 거의 내 비치지 않았던 속내를 불쑥 내뱉고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이가 커가면서 욕구도 다양해지고 많아지다 보니 내가 해줘야 할 일도 점점 늘어난다. 아이가 아직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들은 부모로서 해주는 게 맞다 생각하는데 끊임없는 요구에 지칠 때도 많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엄마가 이래도 되는 걸까’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매우 강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요즘 아이가 스스로 신발도 신고 옷도 입을 수 있도록 하고 옆에서 지켜본다. 바쁜 아침에도 일단 혼자 신발을 신어보도록 하는데 아이는 잘할 때도 있고 못하겠다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딸기 씻고 손질하는 것까지 네 살 아이에게 시킬 순 없겠지.
돌이켜보면 엄마로서의 자아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는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은 둘째 아이를 아기띠로 등에 업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마트 주차장을 다니면 “슈퍼맘!”이라는 엄지척 찬사(?)를 받는 엄마이지만 둘째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나는 내가 더 중요했던 엄마였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내가 지향했던 육아 방식은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육아였다. 똑게 육아의 정확한 개념은 몰랐지만 적어도 엄마의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 키우는 옛날 육아 방식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내 몸을 덜 상하게 하면서 아이도 더 잘 키울 수 있다니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수면교육이었다. 아이를 안아 재우지 않고 눕혀서 잘 수 있도록 습관을 들여야 아이에게도 내 관절에도 좋다고 생각했다. 쾌적한 수면을 위해 방을 분리해서 재웠고, 이유식을 먹을 시기에는 자기주도 식사를 시도했다. 일일이 아이를 쫓아다니며 떠먹여 주는 일이 부모에게 지나치게 수고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쫓아다니며 먹이는 것과 앉아서 먹은 아이가 바닥에 흘린 음식물을 치우는 것 중에 뭐가 더 힘든 건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더 힘들어졌다. 내 몸이 편한 육아를 하는 건 내 시간을 일분일초라도 더 갖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조금이라도 짬을 내서 하고 싶었던 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거나 간식을 먹거나 친구와 전화수다를 떠는 그 아주 소소한, 엄마가 아닌 개인의 욕구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약간의 짬을 내서 할수록 더 갈증을 일으켰고 두 자아는 충돌했다.
둘째를 낳고 나서 엄마로서의 내 모습은 많이 변했다. 첫째 때는 거의 꺼내 쓰지 않았던 아기띠를 항시 착용하고 다녔고 분리수면을 했던 첫째는 어느새 내 왼쪽에, 오른쪽에는 둘째가 베시넷에 누워 함께 자고 일어났다. 이유식은 입맛이 까다롭고 앉아있기를 질색하는 둘째를 위해 한 손에는 밥그릇과 한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는 초밀착 엄마의존 이유식을 했다.
아이 둘은 개인으로서 자아를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유난히 손이 많이 가고 까탈스러운 둘째는 늘 나를 혼비백산 상태에 빠지게 했기 때문에 한 눈 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둘째가 돌이 되기까지 일 년 동안 나는 나를 완전히 내려놓았었던 것 같다. 티비도 덜 보고 글도 거의 못썼다.
그 사이 엄마의 자아는 뿌리를 내리고 줄기는 튼튼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딸기를 씻어 달라는 아이의 끝나지 않는 요청에 문득 잠자고 있었던 내가 고개를 든 것이다. ‘엄마인데 이래도 돼?’라는 생각은 지난 삼 년 동안 육아를 하며 달려온 내게 마치 ‘너 잘 있니?’하고 묻는 안부 인사와도 같았다.
그제야 얼마 전 방문했던 한국에서 대학후배가 물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 둘을 숙소 침대에 눕혀서 재우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그날 저녁 후배는 불쑥 정말 궁금하게 있다며 내게 언니는 언제 엄마가 됐다고 느꼈냐고 물었다.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보다는 엄마로서의 자아가 좀 더 커졌을 때,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괜찮아졌을 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