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만난 상대에게 그저 오다가 들었다는 듯이, 그래서 무심코 전할 뿐이라는 듯이 “오늘 입춘이야.” 가 아니라 “오늘 입춘이래.” 하고 말한다. 마치 어떤 중요한 책임을 멀리 떠나버린 사람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처럼. 이건 아마도 이 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조차 조금은 의아하고 섣부른 느낌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아직 이렇게 추운데.”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대화는 봄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이다. 봄은 대체 뭐길래 오는 통로가 이다지도 길단 말인가. 그럼에도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꼭 이 말을 하는 것은 아직 한참 추울 날이 남았다는 걸, 그 상대방의 예상 가능한 반응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많이 아픈데 병원에선 치료가 끝났으니 이제 그만 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차라리 아직 치료해야 할 것 투성이니 내일도 모레도 꼬박꼬박 병원에 오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 두려운 마음은 한없이 어리석어서 아무리 추워도 익숙해진 겨울을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맘때쯤이면 봄을 느낀다기 보단 봄을 읽는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길을 걷다 보면 낡은 대문 앞이나 오래된 식당 입구에 종종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고 써 붙인 입춘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뉴스에서는 어느 향교에서 열린 입춘행사에서 전통한복을 입은 서예가가 나와 큼지막한 붓글씨로 한 획, 한 획을 더하며 하얀 한지를 채워나가는 모습이 나온다. 계절보다 글자로 먼저 봄을 맞이하는 풍경이 새삼 낯설게 다가오는 찰나에 ‘아, 봄은 손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지독히도 길치여서 혹여 우리 동네에, 우리 집에, 그리고 나에게 까지 오지 못할까 봐 한참 전에 준비해서 마중 나가야 하는 오래 기다린 손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저마다 집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이사를 마치고 때 이르게 옷이 가벼워지던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봄을 맞이하려면 적어도 환영사를 채워 넣을 백지만큼의 여유를 위해 마음 한 편 정성스레 비워내야 하는 것이구나. 막연한 두려움 앞에선 이처럼 섣부른 직관이 때로 대체 불가능한 해석이 되기도 한다.
봄조차도 당연하게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언 바위에 봄비 떨어지듯 꽁꽁 움츠린 마음을 두드려댄다. 어느 집 담장 너머 예기치 않게 마주한 매화처럼 말이다. 벚꽃이 봄이 피워내는 꽃이라면 매화는 봄을 위해 피는 꽃인 것 같다. 아직 너무 미묘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봄의 기운을 땅 속 깊은 곳에서 건져 올려 피워낸 저 눈을 닮은 꽃송이들. 이 느닷없는 찬란함은 아직 아무런 준비도 못한 사람에게 봄의 하이라이트 예고편처럼 재생돼 봄을 기어이 또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나무답지 않게 키도 꼭 사람만 해서 볼 때마다 내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어쩌면 저 매화나무도 두꺼운 외투 속에 몸을 숨긴 채 커다래진 눈으로 잠시 멈춰 선 나를 보며 담장 밖의 봄은 어디쯤까지 왔는지 듣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고나기를 울창하지 않은 나무가 있다는 게, 그래서 더 내게 가까이 피는 꽃이 있다는 게 올해는 유난히도 살갑게 느껴진다.
봄을 읽어서 그런가 이렇게 또 봄 한편을 써내려 왔다. 입춘이니 매화니 뻔한 얘기만 해도 여전히 봄은 생각만으로도 이토록 설렌 지.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는 설렘을 애써 억누르려 멀리 에둘러 봄을 맞이하려는 얄궂은 속셈인 건가 싶기도 하다. 설레는 봄이 온다는 데 나는 넋 놓고 설레지 못해 또 쓸데없이 많은 말을 늘어놓고 있다. 조금은 다른 형태지만 이 또한 봄을 맞이할 마음의 길을 내보려는 소리 없는 움틈이리라. 그러니 이 글을 조금 긴 입춘방이라 불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