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게 길러준 유일한 습관은 바로 내복을 입는 것이다. 사춘기가 훌쩍 지나도록 브래지어 사 줄 생각 같은 건 전혀 못했던 우리 엄마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내게 바득바득 내복을 입어야 한다며 무려 교복 바지를 사줬다. 바싹 마른 몸에 바람 부는 겨울이 가장 두려웠던 나는 크게 군말 없이 꾸역꾸역 내복을 챙겨 입었다. 그 덕분에 나는 살면서 한해도 거르지 않고 내복을 입고 살았다. 그래서 난 내복이 더해 주는 일도씨의 온도를 누구보다 잘 안다. 팔다리에 감기는 그 순면의 부드러움을 정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겨울만 오면 특별할 것 없는 이 느낌이 얼마나 많은 시리고 아린 순간들을 견디게 해 주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누구도 부러워할 리 없는 이 자부심으로 지금부터 난 마치 세상에서 내복을 제일 잘 아는 사람처럼 내복에 대해 훈수를 좀 두겠다.
내복을 제대로 입으려면 잘 여밀 줄 알아야 한다. 내복 바지의 허리춤을 내복 상의 위로 한껏 끌어올려 몸통으로 바람이 통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런 다음 서랍에서 가장 긴 양말을 꺼내 그것의 목 부분으로 내복 끝단을 덮어 올려 발목으로 한기가 스미는 걸 막아야 한다. 번데기처럼 빈틈없이 감싸진 몸 위로 외출복을 입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오직 이 단 한 겹의 든든함을 보태면 그저 한낱 종잇장 같은 몸을 사방으로 엉켜대는 섬의 찬 바람 속으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내복을 입는 것이 아니다. 내게 내복이란, 대적할 수 없는 세상의 풍파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을 다독이는 최소한의 의식이자, 그의 무기 없는 빈 손에 들려주는 최대한의 보탬이다. 이것이 얼마나 유일하면서도 커다란 일인지를 나는 해를 거듭하며 깨닫고 있다.
지금 창밖은 겨울이다. 겨울이면 어째서인지 난 기나긴 능선을 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변시지 화가의 그림 때문일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소나무들이 휘어지고 말 갈기가 흩날리는 풍경 속에서 매번 허리 휜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 노인이 하도 쓸쓸하고 고되 보여서 그저 그림 앞에서 저 사람에게 내복을 입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사실, 내복 같은 건 필요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 추운 겨울에 기어이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저 사람만의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넘겨짚고 싶어 진다. 그의 곁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래된 소나무이거나, 직접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키 작은 조랑말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날씨 따위에 미룰 수 없이 찾아가야 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풍경 뒤에 저 사람을 견디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를 부디 희망한다.
내게 내복을 가르쳐준 우리 넘는 이 겨울을 무엇으로 버티고 있나. 매일 밤 끼고 사는 모노륨장판과 드라마일까? 그게 아니면, 내가 함께 있을 땐 받지 않는 전화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엄마만의 것이 또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어쩐지 후자가 있기를 고대해 본다. 세상 모든 이의 고유함이 내복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피부 가장 가까이에서 세상을 함께 건너가 줄 그 무언가가 말이다. 그런 그 누군가의 살 밑으로 삐져나온 내복을 슬쩍 발견하면 난 왠지 마음이 놓인다. 한파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인생이란 오기가 어니라 내복으로 버티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세상을 잘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마저 훈훈하게 한다.
겨울이면 내복이겠지만, 여름이면 냉커피 정도가 될 수 있을까. 봄과 가을에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앞으로의 계절들이 지금까지의 계절들과 사뭇 다르지 않을 것이란 믿음 속에서, 그 믿음만이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기대와 희망 속에서 지금을 마주하고 싶다. 사계절 내내 겨울이어도 괜찮다. 내겐 닳지 않는 내복이 있다, 글쓰기가 있다. 당신에겐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