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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취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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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숨 Aug 31. 2023

애호박 새우젓국

2023.8.4


다른 계절보다 여름이면 더 잘해먹는 반찬 중 하나가 애호박 새우젓국이다. 요즘이야 애호박을 사시사철 슈퍼에서 구할 수 있지만, 여름의 애호박은 그 맛이 더 진하다. 제철이라는 기분 탓일 수 있지만 진짜의 맛이 느껴진다 할까.


말이 “국”이지 국물은 자박한 정도일 뿐이다. 애호박 하나를 일정한 간격으로 써는데, 연한 과육이 잘릴 때면 투명하고 끈끈한 단물이 배어 나온다. 썰어낸 애호박은 작은 다시마 한 조각과 함께 끓이는데 이때 물은 애호박이 잠길랑말랑한 정도이다. 그리고 다진 마늘 한 숟가락, 새우젓을 한 숟가락 넣고 호박이 투명한 노란 빛이 될 때까지 익혀주면 된다.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불투명의 노란색이 연두 빛이 스민 투명한 노란색으로 변하는 마법의 시간이 흐른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반 숟가락 정도 넣으면 예쁜 빨간 물이 들며 칼칼한 맛도 낼 수 있는데 요즘은 넣지 않고 있다.


아, 조리가 끝나 불을 끈 후에는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곧바로 유리 용기에 담아야 한다. 예전엔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냄비에 넣어둔 채 두었더니 색이 안예뻤다. ‘왜 예쁜 연두 빛깔이 안나지’ 고민하니 금방 옮겨담아야 하는 거라고 시어머니가 알려주셨다.


사실 이건 내가 어릴 때 나의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반찬이다. 참기름을 좋아하신 할머니의 반찬엔 늘 기름이 많이 둘러져 있어 걸쭉하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계실 땐 그해 결혼했던 내가 신혼집에서 저 반찬을 만들어가니 병원 음식에 입맛이 없었는데 참 맛있다며 밥 한 공기를 뚝딱 잘 드셨다. 할머니는 병실 침상에 앉아 드시고 나는 그 맞은 편에 서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며 뭉클했던 장면도 떠오른다. 장마철이라 우산을 쓰고 병원에 들고 갔던 그 여름 날씨도 생각난다. 그렇게 외할머니께 배운 반찬을 내 딸아이가 먹는다.


말캉한 애호박에 마늘과 새우젓이 만들어낸 짭조름한 국물이 스며 호로록 넘어가는 반찬. 따뜻한 밥 위에 차갑게 올려 먹어도 좋고 살짝 따뜻하게 데워 먹어도 좋은 맛.


그러고보니 유학 시절에 이 애호박이 참 먹고 싶었다. 정말 많이 그 맛이 그리웠다. 웬만한 식재료는 다 구할 수 있던 뉴욕이었는데도 내가 다니던 한인 마트나 중국 마트, 일본 마트에서는 끝내 못찾았는데, 애호박과 비슷한 주키니만 있을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키니를 사서 해봤지만 약간 씁쓸한 맛이 났을 뿐, 애호박에서 배어나오는 달짝지근함이 없었다. 농산물이라 함부로 가져오면 안되니 한국에서 오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구할 수 없으니 간절함이 배가 되어 한동안 먹고 싶단 생각에 얼마나 애가 탔던지. 결국 호박고지를 구해서도 해봤지만, 대보름 때 해먹는 나물 느낌이지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었다. 신선식품과 건조식품이 같을 리가 있나.


며칠 전 대형 마트에 가니 애호박을 무려 8개나 한묶음으로 팔고 있었다. 아무리 많이씩 사면 가격이 내려간다지만 이렇게 많이 사서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어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일단 카트에 담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애호박 사지마요. 내가 네 개 줄게.”

철 지나기 전에 많이 먹자, 애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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