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업

작업의 조건

by 어떤 숨

직장인이 아닌 나는 작업을 매일 꾸준히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내적 조건으로 창작에 대한 욕구 혹은 동기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외적 조건으로 작업실에 갈 물리적 시간과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먼저 창작 욕구 혹은 동기에 대해.

‘귀찮아’ 라는 생각이 한 번 스며들면 위험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매일 꾸역꾸역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동안 주어진 일을 하고, 감당 못하겠다 혹은 이제 지친다 할 때쯤이면 돌아오는 월급날’ 같은 것도 없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귀차-' 생각이 드는 순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내 작업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작업물을 사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도 한 명 없는 상황에선 스스로에 동기를 부여해주어야 한다.

‘자꾸만 만들고, 실험하고, 제작하다 보면 무언가가 나오겠지’

라는 주문. 사실 이쯤에서 먹고 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게 월급을 벌어오는 남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다. 그렇다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싫으니까. 무언가를 "손으로" 생산하고 싶어 긴긴 시간, 큰 돈 들여 유학까지 다녀온 공부를 그만 둔 나니까.


그냥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거면 안된다. 뭐라도 “공예로움”을 나타낼 수 있는 것, “인간의 창조적인 작업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머리도 많이 굴려보고 손도 많이 써봐야 한다. 그러기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굳이 일만 시간의 법칙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시간이 쌓여가며 기술과 생각이 발전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겠지, 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투자를 하는 셈인데. 사실 쉽지 않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돈 혹은 명성—가 없으니까.


그런 시기인 요즘 나를 채찍질 하는 건 다름아닌 첫째 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이제 2학년이 되니 아침이면 일하러 출근하는 아빠,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엄마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나 궁금해 한다. “우리 엄마는 유리 작가지.” 유리 작업을 보고 듣고 만지고 했으면서도 정해진 시간의 일, 직장이 없는 엄마는 뭔가 신기하다거나 이상한가 보다.

“엄마는 나 학교 가면 뭐 해?” 혹은 “엄마는 몇 시에 일하러 가?” 등 엄마의 일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

“엄마 할머니 집 1층에 있는 작업실에서 유리 작업하잖아.” 알려주면,

“아..” 하면서도 구체적인 내 일과를 묻곤 한다.

엄마가 집에서 노는 꼴은 못보겠다는 건가. 집에만 있어도, 살림만 해도 엄청 바쁘거든?

물어보는 횟수가 부쩍 잦아진 딸내미 덕분에라도 자꾸 무언가 “내 일”을 만들어야겠다 더 다짐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 결심만으로는 쉽지 않다. 아무래도 그 “얽매일”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건 언제든 내 일이 나중 순위로 밀려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 나이인 아이들이 아프면 모든 계획과 뜻은 어그러진다. “혼자 앓기”라는 것은 꽤나 고난이도의 기술이라 아파도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몸을 건사할 수 있어야 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 혹은 철듦이 조건으로 필요하다. 그러니 그때까지 “아이의 아픔”은 “보호자의 멈춤”을 뜻한다. 그러니 우리 집에선 ‘출근 시간이 없어‘ 바쁠 것 없는 엄마가 보호자 역할 당첨이다. 아이의 아픔 앞에 내 일을 못한다고 투정할 것도 아니고 하소연 할 것도 없다. 어차피 어린 시절 잠깐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이니 아까울 것도 없다. 나중엔 엄마를 찾지 않는 아이들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게될 때도 있을 테니. 그래도 이런 아이들 병치레 외에도 내 자신의 컨디션, 집안 대소사 등에 내 작업은 완전히 일시정지 상태가 된다.


체력이라는 것도 정해진 정도가 있는데 우선순위에 빼앗기고 나면 내 작업용 체력이 밑바닥이 된다. 억울하진 않지만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내가 뭘 하는 거지, 하고 작업을 재개하기 위한 곱씹기 시간이 좀 걸리니까.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예쁘다"라는 형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