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2025.10.21

by 어떤 숨

“문득 떠오르는 외할머니. 호박나물에 밥을 비벼 간단하게 한 끼를 드시던 모습에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라도 초라해 보인 적이 없으셨다. 하늘이 무너질 듯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당당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새우젓을 다져서 양념장을 만든다. 하숙을 쳐야 하는 시절이었을 때도 하숙생들이 할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밥상을 받곤 했다. 그 기억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적당한 크기의 단아한 쪽머리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걸으시던 뒷모습이 아름다웠지.

또 하나 더. 한여름이 지나면 나오는 늙은 오이 노각으로 초고추장 무침을 하여 밥을 비벼 드시던 외할머니. 노각의 미끈미끈한 시원함이 목으로 잘 넘어간다고 간결하고도 맛나게 드시던 모습. 어느덧 나도 노각의 나이가 되어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늙은 오이의 겉은 거칠거칠하고 험악한 피부를 가졌지만 속은 연둣빛 흰색을 띤 무미의 맛. 그 매력을 헤아리게 된다.“

(호원숙, <<엄마 박완서의 부엌: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67-68)



깜짝 놀랐다. 우리 외할머니 이야기인 줄 알고.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우리 할머니는 여장부셨다. 지금도 가족들은 할머니를 말할 때면 “측천무후”라 부른다. 그만큼 어디서나 대장 같은 포스를 풍기셨고, 가족들 모임을 진두지휘하길 좋아하셨다. 게다가 외출 때면 잘 갖추어 입으시고 좋은 것들로 꾸미고 다니시는 멋쟁이셨다. 누구에게나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셨던 것 같다.

가끔 동네/측근 할머니들을 집에 불러 이방 저방에 셋넷씩 둘러 앉혀 마작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들 중 하루가 생생하게 기억 난다.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대학에 가기 전 중고등학생 때였던 듯 싶다. 할머니는 혼자 사셨는데, 어느 날 가보니 그집에 할머니 친구분들이 많이도 모여계셨다. 그날 엄마와 외숙모(들)—두 분의 외숙모가 계신데 두 분 다 계셨던가 한 분만 계셨던가 기억이 안난다—는 할머니들의 음식 시중을 드셨다. 원래도 걸걸하게 목소리가 큰 우리 할머니는 그날따라 더 목소리가 크게 울리셨다. 이건 여기에, 저건 저기에, 누군 이 자리에, 누군 저 자리에 등등. 모두 내 집에 모았다, 하는 모임의 수장으로서의 위엄이리라. 그때까지도 담배를 피우시던 우리 할머니는 한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다가 마작하는 할머니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시며 필요한 건 없나 살피곤 하셨다. 딸, 며느리들이 음식을 담은 게 마음에 안들면 비키라 명하시곤 당신께서 음식을 담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보다 적어도 20년은 훌쩍 전의 일이니 배달음식이라고는 동네 중국집만 있던 시절이다. 그러니 잔치 음식은 당연히 집에서 준비해야 했다.

할머니는 담배 때문에 늘 기침을 하시고 숨차하시곤 했지만 관절은 어디 하나 불편한 곳 없이 늘 꼿꼿하셨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 걸음이 느려지신 것도 숨참 때문이지 무릎이나 허리의 고장이 아니었으니까. 머리는 늘 반듯하게 쪽진 머리시기에 언젠가 할머니가 샤워 후 머리를 말리시는 모습을 보고 그 긴 머리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늘 고정되어 있는 할머니의 머리가 숱이 많지는 않을지언정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결혼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니 할머니는 정말 긴 세월 혼자셨다. 그나마 슬하의 삼남매가 어린 시절은 지나고 돌아가셨으니 할머니가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은 덜하셨겠지만, 그 옛날 과부로 산다는 건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더 당당한 여장부가 되셨으려나. 남편이 없이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기세를 다잡기 위해 몸과 마음을 꼿꼿하게 세우셔야 했을 테다.


그런 할머니께 내가 배운 음식이 애호박 새우젓국이었다. 발간 모양새는 있어도 양념이 뻘겋게 보이면 안되는 음식 중 하나이다. 할머니도 음식이 뻘건 양념으로 있으면 상스러워 보인다 하셨는데 호원숙 작가의 다른 글에 “고춧가루를 그냥 넣으면 음식이 천박해 보인다”라는 문장이 있어 반가움에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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