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한 줄이 밥 한 공기

2022년에 꺼내 먹는 2021년의 글 <읽는 먹방>

by 덩이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도시락을 준비했다. 어린이집에서 야외로 체험학습을 간다고 했다. 옛날 생각을 하며 김밥을 만들었다. 입도 작고 양도 작은 아이를 위해 밥도 조금,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도 가늘게 준비해 가느다란 아기 김밥을 두 줄 만들어 예쁘게 자른 것만 새로 산 작은 도시락 통에 담아 보냈다.

우리 아이가 이제 도시락을 먹게 되었네.

내가 첫 도시락을 싸 보내니 기분이 묘하다.


운동회나 소풍 때 아침이면 엄마는 김밥을 싸셨다. 네 남매의 아침 겸 점심 도시락으로 만드시는 거라고 쳐도 엄마는 무엇을 하든 음식은 늘 푸짐하게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벌써 아래는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산의 형태로 김밥이 쌓여 있었다.

제일 풍족하게 속 재료가 들어갈 때를 기억해 보면 단무지, 당근, 시금치, 계란, 햄, 게맛살이었다. 철에 따라 시금치 말고 오이가 들어가기도 하고 가계의 상황에 따라 게맛살이 빠지기도 했다.

당근은 얇게 채를 쳐서 식용유에 볶아내면 단맛이 확 올라간다. 계란은 잘 풀어 소금 간을 하고 지단을 부친다. 갓 부친 계란지단은 봉긋하게 부풀어 올라 폭신해 보인다. 남아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재료였다. 햄이나 맛살은 남을 일이 거의 없었지만 계란은 항상 넉넉하게 하셔서 조금씩 남았다. 엄마가 김밥을 싸고 계시면 그 옆에서 엄마 이거 먹어도 돼? 물어보고 먹었다. 단무지는 짠맛을 좀 덜어내기 위해 물에 한 번 헹궈낸다. 시금치는 데쳐서 물기를 쪼옥 짜고 소금 간을 살짝, 참기름 더해 무쳐놓는다. 오이를 쓰게 되면 세로로 길게 잘라 씨 부분을 베어내고 소금에 절였다가 쓴다. 절인 오이를 물에 한 번 헹구고 물기를 꽉 짜 놓는다. 오이는 시금치만큼의 강한 초록색을 내지 못하지만 맛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이를 넣은 김밥은 싱싱함이 느껴진다.

그 시절 내가 생각했을 때 김밥의 주인공은 햄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햄은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였다. 햄은 부유함의 상징과 같았고 사랑받는 아이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항상 우리 집 김밥의 햄이 좀 더 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김밥을 만들면 햄은 두껍게 썰거나 두 개씩 넣는다. 게맛살은 햄과는 다른 존재감이었다. 햄만 있다면 게맛살이 없어도 섭섭하진 않지만 게맛살은 도시락 뚜껑을 열 때 나의 자신감을 한 층 더 올려주는 속 재료였다. 이렇게 준비된 속 재료들은 쟁반 위에서 가지런히 앉아 기다린다.

이제 밥을 준비할 차례다. 하얀 쌀밥에 소금, 참기름, 깨소금으로 간을 하면 밥만 집어먹어도 맛있었다. 간이 맞나 먹어보라고 엄마가 주먹으로 조물조물 뭉쳐서 입에 넣어 주신 그 밥은 달고 달았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향긋한 생김을 꺼내 성긴 김발 위에 놓고 그 위에 한 김 식힌 밥을 펼친다. 속 재료들을 차례차례 넣어서 동그랗게 말고 김발로 싸서 꽉꽉 말다 보면 살짝 네모난 엄마의 김밥이 탄생한다. 가끔 엄마가 ‘아이고, 당근을 안 넣었네, 계란을 빼먹었네’ 그러면 당근 없는 또는 계란 없는 김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뭐 하나가 빠진 건 빠진 대로도 맛있었다. 산더미 같은 김밥을 다 말고 나면 달군 프라이팬에 살짝 김밥을 굴려서 생김의 비린내를 날린다. 엄마만의 방식이었다.

한 때 교회 건강식을 배우신 시절엔 흰쌀이 들어가지 않은 시꺼먼 현미밥으로 김밥을 싸주셨다. 껄끄럽고 향이 짙은 현미밥은 김밥 속 재료와 따로 놀고 맛이 없었다. 건강식 현미밥 시절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김밥은 늘, 항상 맛있었다.

김밥과 함께 미역국을 끓이셨다. 미역국과 함께 김밥을 먹으면 목이 메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김밥도 맛있고 미역국도 맛있어서 아침부터 많이 먹는다. 그래도 집에서 싼 김밥은 소화가 잘 되었다.

아침을 다 먹고 나면 도시락을 채운다. 엄마가 김밥을 썰어주시면 도시락 통에 빈틈이 없이 신중하게 꽉 채워갔다. 하나라도 더 싸가라고 남는 틈에 맞게 김밥을 얇게 썰어주시기도 했다.

소풍이나 운동회를 마치고 집에 가면 또 김밥이 기다리고 있다. 쉴 수 있으니 냉장고에 넣어 둔 김밥을 달걀물에 풀어 부쳐주시면 저녁밥으로 뚝딱이다. 김밥으로 아침을 열고 김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보내고 달걀 김밥전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종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 김밥의 추억은 푸짐하고 꽉 차있다.


아이의 김밥을 싸고 나서 우리를 위한 김밥을 만든다. 밥은 조금만 넣고 당근 듬뿍 넣고 오이와 단무지는 한 줄씩, 게맛살도 아낌없이, 계란지단과 햄은 두툼한 걸로 속을 꽉 채운 김밥 여덟 개를 말았다. 김밥을 쌀 때 김과 단무지가 늘 애매하다. 김밥 김은 열 장이 들어있고 단무지는 제일 작은 용량을 사도 열 개가 넘는다. 그냥 김 한 봉지에 맞춰 김밥 열 줄을 싼다.

-어이구, 많이도 했네. 이걸 누가 다 먹어?

-우리가 다 먹지.

조금씩 양을 줄여가고 있지만 엄마를 닮아서인지, 배워서인지 음식을 푸짐하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

엄마가 그러셨다. 김밥 한 줄이 밥 한 공기라고. 그 이야기를 되새기면서도 김밥 열 줄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김밥 한 줄이 밥 한 공기지만 세 줄까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김밥과 인체의 신비로운 힘을 나는 믿는다.

김밥엔 믹스커피

2022 년 8월 31일

며칠 전 저녁에 김밥을 쌌다. 세 식구 먹을 일곱 개만 싸야지 해놓고는 여덟 개를 말았다.

남으면 할 수 없지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전 24화쇠고기 미역국 끓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