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은
마지못해 물러선 경비를 뒤로하고
드디어
김약사의 집 대문을 힘차게 열며
당당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자동네에 있는
땅값만 비싼
낡은 단독주택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부는 놀라웠다.
정면에선
문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의 외관은 몽블랑 빵처럼 생겼고,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있는 마당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왼쪽 길이 나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길을 따라 돌아가니
건물의 안쪽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또다시 인터폰을 누르고
화면을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은 문을 연 기술자가
모든 잠금장치에 해제를 걸어놓은 상태였기에
자동문은 열려있는 상태였다.
눈앞에는 우산꽂이에 꽂힌 장우산 몆개와
낮은 신발장에 층층히
그리고 가지런히 놓인
낡은 구두와 운동화, 단화 등 신발들이 있었다.
그러나
넓은 공간에 그것말고는 없었다.
김지영은
또 다시 눈 앞을 가로막는
미닫이 모양의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슬리퍼들이 눈 앞에 보였다.
그 슬리퍼들이 김지영을 반기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슬리퍼를 신었다.
들어서니
대리석 바닥에는
길을 내듯 길게 깔린 카펫이
무덤덤하게 무채색으로 깔려있었다.
카펫을 바라보며
이 공간의 주인은 김지영이 봤던
그 김약사가 아닐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림을 제외하고 거실을 채우고 있는
무채색의 무덤덤한 색깔은
김약사의 사진속에서 차분하지만 유일하게 반짝이던
김약사 눈빛과는 분명히 달랐다.
내부는 넓고 조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벽마다 미술관처럼 그림이 걸려있었지만
내부는 넓은 공간에 비해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 거실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텅비어 있는 공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ㄱ자로 구부러진 쇼파때문이었다.
쇼파위에는 무릎담요가 여러개 놓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있는 듯 없는 듯
거실 벽 구석에 키 큰 나무처럼 길게 자리한 장식장이
술병들이 가득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참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소한 물건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자리하고 있는 것들은
그곳에 놓여있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범하다못해
지나치게 낡은 삶을 살아온 김지영에게
이 집은
지구가 아닌 외계의 어떤 곳 같았다.
왜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까.
사람이 살기는 했던 것일까.
어디로 가야 돈이 될만한 것들이 있을까.
도통 짐작할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모든 방의 문이 복도와 같은 색인 데다
문고리는 잘보이지않는 문과 같은 색깔의 매립형이었는데,
문고리를 찾고, 가볍게 터치하면 문고리가 툭 하고 튀어나와서
그것을 잡고 가볍게 열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렸다.
김지영은 평범하지않은 집에, 이 집 사람들에게 분노가 차 올랐다.
갑자기 평소 내뱉곤 하는 욕이 튀어나왔다.
어찌됐든 찾아야 하는 것이 있으니 김지영은 화를 누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1층 복도를 따라 몇 개의 방이 있었고,
왼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은
특별한 곳임을 알리듯 두꺼운 문으로 닫혀있었다.
문에 달린 두 개의 긴 손잡이를 열어젖히며
두꺼운 문을 열었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음악실이 나왔다.
방에는 그랜드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등
크고 작은 악기들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음악실 말고 그런 곳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알지못했으므로
김지영은 그 곳을 음악실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방에는
한쪽벽을 가득 채운 책꽂이에 악보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김지영이 영화에서나 본 적 있는
독특하고 고전적인 스피커가 달린 LP 플레이어와
몹시 비싸 보이는 오디오가 놓여 있었다.
그림 감상하길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궁금했지만 어차피 알게되리라.
방을 나와
계단 위로 올라갈 것인지
1층에 있는 방문들을 열어볼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숨 고르기를 하는 기분으로 계단을 아주 천천히 조심해서 올라갔다.
계단 벽을 올라가는 내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색감이 아름다운 그림,
거꾸로 걸린듯한 그림,
쓰레기처럼 쓸데없어 보이는 그림 등.
계단을 다 오르고 작은 화장실을 지나
슬라이드 문을 여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의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있었으나
샹들리에의 어두운 조명을 야단치듯
그 공간의 천장과 벽에는 밝은 조명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곳은 대형 도서관이었다.
책들의 냄새로 가득 차있었고,
습도계와 온도계가 곳곳에 붙어있어서
무언가를 냉장고에 보관하듯
책의 상태를
신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책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볼수있는 곳 말고도
안쪽에 책장이 더 있었다.
옆으로 움직이는 책장 속에
또 다른 책장이 나타났고
사다리까지 달린 책장에는
천장까지 책이 꽂혀있었다.
넓고 큰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유일한 물건은
커다란 책상과 의자였다.
이곳 역시
밖으로 나와있는 물건은 책말고는 없었다.
단하나,
책상 위에 노트북만이
입을 꾹 닫은 채로 놓여있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많은 책을 살수있을까.
책 말고도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쓰러져있던 김약사는 몹시 평범해보였고
김약사의 가방도 별 거 없어 보였다.
맞다.
평범한 김약사의 가방에 평범치않은 것들이 들어있긴 했었다.
그 평범치않음을 쫒아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이상한 집에 다다른 것이 당연할지도.
그냥 이곳은 이상한 나라이고
이곳에서 헤매고 있는 김지영 자신은 앨리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알고 있는 자신이 대견해서인지
실마리를 놓치지않은 것이 자랑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지영은 본인이 몹시 맘에 들었다.
다만,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경험상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은 늘 조심해서 대해야 했다.
특이하다는 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어서
그들과는 대화자체가 어려웠다.
남들이 웃을 때 잘 웃지 않았고
남들이 웃지 않을 때 웃는 사람들.
본인이 왕따 당하는 줄도 모르던 아이들 중
종종 있었다.
평범함을 모르는
특별하고 이상한 아이들.
이번에는 오른쪽 계단으로 길을 잡아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와서
오른쪽 계단에서 제일 가까운 방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거실은 놀이방처럼 보였다.
모든 물건들이 작았다.
바닥 전체에 깔린 카펫,
유아용 미끄럼틀보다 좀 더 작은 미끄럼틀과
온갖 장난감들, 놀이터.
소인들의 나라에 방문한 기분이었다.
가족관계증명서는
김약사에게 가족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마치 아이 방 같았다.
만약 김지영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는 없는
어떤 가족이 김약사에게 있다면,
그 가족의 존재가 누구이든
김지영에게는 불운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잠시 깊이 잠자고 있던 불안과 공포가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김지영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다음으로 열어 본 방은 침실이었다.
김지영의 맘이 부풀었다.
꼭 그곳에
금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커다란 침대와 그 위를 덮고 있는 침구,
침대 옆 양쪽에 놓인 협탁 위 좌우한쌍의 조그만 등,
그리고 이어진 방 베란다에는 흔들의자가 있었다.
흔들의자 위에는
읽다 만,
펼쳐진 책이 놓여 있었다.
금고가 반드시 침실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공들여 샅샅이 뒤져봐도
금고처럼 생긴 것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영화에서처럼
벽이나 바닥을 누르면 뭔가 튀어나오는가 싶어
벽에 붙어 눈을 부라려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부자들은 금고를 다른 곳에 두는 것일까.
영화에서처럼 은행같은 곳에 비밀금고가 있다면
그 곳까지 갈수는 없을 것 같아 실망감이 밀려왔다.
침실 안쪽에 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한쪽문 안쪽에는 욕실과 연결된 화장실이 있었고
다른쪽은 부엌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불이 켜지면서
앞쪽으로 냉장고가 보였다
냉장고 안에는 썩은 과일과 야채,
한 칸을 가득 채운 생수와
강아지 사료, 간식들이 들어있었다.
그제야 김지영은
아이방처럼 보였던 곳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거인이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집 어디에도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짖으며 뛰쳐나올것 같아 불안했지만
한편으론
사람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김약사의 집을 뒤지는 그 순간에도
김지영은
쓰러져있던 김약사가
이미 죽어
신원불명의 시체로 처리되었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갑자기
조용한 공기를 휘저으며
벨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