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이상했던 것은
김지영이 계속해서 카드를 사용해도
카드 정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제일이 몇 번이고 지나갔을 텐데
돈을 갚지 않아도
카드 사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카드를 쓸수록 김지영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게다가 가방에 들어있던 현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다급해진 김지영은
신분증에 있는 주소지를 찾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기를 여러 번,
부자동네 특유의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동네였다.
김약사 집은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로 된 담장과
사람 힘으로 열릴까 싶은,
높고 무거워 보이는 대문 때문에
외부에서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외부와의 차단을 목적으로 지어진 집이었다.
사진 속에서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던
김약사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폐쇄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집이었다.
대문에 손만 대도 큰소리의 경보가 울릴 것 같은 불안감에
김지영은
집 주변과 멀리 떨어져 배회할 뿐,
집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집을 열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불안 감 없이 사용하기 편한 현금이
아예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외모는 거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해졌고
모든 신분증과 사진을 완벽하게 세팅해 놓았으니
겁낼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D-day를 정했다.
김지영은
훔친 카드를 잠시 사용하는 것과
훔친 신분을 가지고 그 사람으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만큼 똑똑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심장이 뛰는 일을 선택했다.
그것은 언제나 김지영다운 일이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며
반성하며 돌아설 줄 아는 양심이나 용기가
김지영에게는 없었다.
매번 그렇듯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불을 향해 돌진하는 것,
그것밖에 김지영이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큰 선물의 포장지를
풀어보지도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김지영은
집주인답게
어깨를 쫙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열쇠공을 데리고 집 대문 앞에 섰다.
대문 앞에 서서 기술자에게
몹시 복잡한 구조의 열쇠라는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기척도 없이
검은색 복장의 사람이 쓱 나타났다.
그는 신분증을 요구했다.
갑작스레 당한 심문에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낼뻔했지만
다행히도 흡,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김지영은 김약사의 목소리로 반응했다.
순한 눈의 표정을 짓고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반응했다.
부자동네에 흔히 있는 보안요원이었으므로
김지영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않았다.
당당하게 내민 신분증에는
김약사 모습을 한 김지영의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지영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김약사는 태어나고 자란 그 동네의 이웃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살았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시절에는
그나마 인사를 나누던 이웃도 있었으나
김약사가 다시 본가로 돌아온 이후로
사람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워낙 집집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으므로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김약사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김약사를 눈여겨보던 사람이
바로
경비 중 한 사람, 이민희였다.
CCTV 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외부인이 배회한다는 신고가 들어오거나
민원이 들어올 때
잠시 출동하는 일이 다였다.
부자동네답게 조용한 편이었지만
보기보다 까다로운 일이 많았다.
특수부대 출신의 이민희는
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
삼십 대 중반까지 거의 10년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 취직했을 때 잠깐 볼 수 있었던 김약사가
독립하면서
한참동안 보지못하다가
집주인으로 김약사가 돌아왔을 때
왠일인지
무척 반가웠다.
김지영은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
그 동네 사람답지 않게
만나면 공손히 인사하는 법을 알았고
목소리늘 높이는 법이 없었다.
늘 소란스럽고 등장하는 화려한 어머니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키 크고 조용한 아버지를 많이 닮기는 했으나
김약사의 분위기는
두 사람 모두와 달랐다.
김약사는 동네 뒷산을 자주 돌아다녔다.
은근히 걱정되었던 이민희는
김약사가 집 밖에 나타나면
눈을 떼지 않았다.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워낙 집중해서 관찰을 하다 보니
김약사 본인도 모를만한 작은 습관들을
이민희는 알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보이지 않던 김약사가
외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이민희는 CCTV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김약사와 아주 흡사했지만
분명 김약사와 어딘지 달랐다.
이민희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갔다.
김약사처럼 보이는 그 사람에게
먼저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 사람이 내민 신분증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이 김약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눈빛의 이민희는 물러나지않고
김지영에게
열쇠공을 불러
왜 자기 집 문을 따고 있는지
이유를 물었다.
김지영은 자기가 사고를 당하고
기억이 돌아오지않아
집에도
이제야 찾아왔다고 강조하며,
자기가 없는 사이
무슨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오래된 잠금방식과 비번이 불안하여
새롭고 안전한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김약사라고 말하는 김지영을 향해
이민희는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설명하는 목소리 또한
평소 귀하게 들었던
김약사의 목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민희는
피가 차갑게 식으며
뒷골에 쭈뻣서는 것 같았다.
평소 화면을 통해
김약사의 몸짓이나 행동만 지켜봤을 뿐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시선을 잘 맞추지 않고
거리를 두는 태도로 인해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워낙 낯을 가리는구나 생각했다.
드물게
강아지 산책길에 강아지가 나무에 누는 오줌이나 똥 때문에 들어오던 민원을 전하곤 했다.
아무리 잘 치워도 눈에 거슬려하는 이웃들에게
너무 미안해하는 김약사 때문에
이민희는 그 후 똑같은 민원이 들어와도 전하지 않았다.
자기 일을 게을리한다고 누가 말한들 어쩔 수 없었다.
이웃들의 말을 전하는 순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소극적인 사람에게
컴플레인을 전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일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왔지만
몇 달 동안 김약사는 보이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도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 집 강아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깊어지고 있었으나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걱정하던 차였다.
때마침
김약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김약사의 신분증을 내밀며
쏘아보는 눈빛의 그 사람은
김약사가 아니었다.
김약사에게는 전혀 없었던 공격적인 몸짓과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차이를 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비슷한 얼굴과 몸집을 지녔지만
이민희 눈에는 그 사람이 김약사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늘 차분했지만
전체적으로 기운 없이 걸어 다니던
김약사와 다르게
김지영의 눈빛은
알 수 없는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경비 이민희의 오감은
온몸에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