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김약사의 뇌는 쉬고 있었다.
초긴장 상태로
사람을 대하고
약을 조제하며
약사로 살아오길 30년.
잃어버린 그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김약사는 공황장애 환자가 아닌
기억소실증을 앓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양이여인에게서 배우게 된 마사지는
몸에 잘 익히는데 쉽지 않았지만
생체해부도라든가,
피가 흐르는 혈관들의 분포도라든가,
혈자리 등을 공부하는 것은
밥먹듯이 쉬웠다.
신기하게 여긴 고양이여인이 캐물었지만
김약사 본인도
기억이 안나는 일을 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런 공부들이 재미있고 쉬웠다.
한때 신의 손을 가진 마사지사로
이름을 날렸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고양이여인이
왜
이렇게 낡고 어두운 곳에 숨어 사는지
아직 잘 알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사지사로서
실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고양이여인에게
전수받은 것들은
김약사가 접해본 적 없는
종류의 마사지 방법이었지만,
고양이여인은
마사지를 통해
김약사의 지병이었던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고쳐주었다.
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언젠가 이런 침대에 거꾸로 엎드려
작은 구멍에 얼굴을 처박고
가쁜 숨을 쉬며 마사지를 받았던 기억이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희미한 기억의 조각일 뿐
완벽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런 기억의 조각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고작
과거의 김약사가
마사지를 받을 정도로
윤택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였다.
김약사의 새 이름은 김 선생이었다.
김약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자
고양이 여인의 성씨 이기도 했다.
고양이 여인의 이름은 김현미이고,
김현미는 낡은 건물 전체를 쓰고 있었다.
마사지샵은 1층에 자리하고 있고
2층은 김현미의 살림집이었다.
방 2개의 거실과 주방이 있는 투룸이었고,
뒷문이 따로 있어 마사지샵을 지나가지 않고
뒷문으로 난 계단으로 나갈 수도 있는 구조였다.
김현미와 김약사 외에
한 사람이 더 살고 있었다.
살림집 방한칸을 차지하고 누워있는
고양이여인 동생의 이름은 김윤미였다.
중학생 때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했으며,
고양이여인은 동생을 돌보기 위해
마사지사가 되었다고 했다.
동생을 마사지할 때
고양이여인의 표정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마치 최고의 VIP를 대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강약조절을 하며
대답하지 않는 동생을 향해
자문자답도 해가며
하루에 한 번 절대 거르지 않고
김현미는
신성한 의식처럼 행하고 있었다.
어릴 때 사고 후
몸만 커진 동생은
김현미로부터 지극한 간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김약사는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기억을 다 잃었음에도
왠지
그렇게 애정을 주고받은 존재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 사람이
직접
김약사를 찾으러 와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고양이여인이
때에 절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올라왔다.
지치고 배고픈 눈빛과 순한 심성을 드러내는
착한 눈의 백구였다.
흰색이 때에 절어 회색처럼 보였지만
더럽다는 생각보다
만지고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고양이여인은 혹시 모르니
일단 씻기고 병원에 데려가
예방접종해야 한 후 만지라고 말렸지만
김약사는 백구를 향해 다가서서
눈을 맞추고
천천히 몸을 낮추고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긴장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털도 세우는 듯했지만
잠시 후 긴장을 풀고
가만히 몸을 기대 왔다.
김약사는
백구를 쓰다듬으며
갑자기
펑펑 울기시작했다.
고양이여인이 아무리 말려도
계속 울기만 했다.
너무 울어 기력이 다해 쓰러질 때까지
울 것처럼 울고 있었다.
걱정이 된 김현미는
김약사를 눕게 하려고 애썼지만
김약사는 앉은 채로
백구를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김현미는 말리고 말리다
포기하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이 일주일에 한 번있는 휴일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김약사의 우는 모습이 너무 처연해서
점점 슬퍼지던 김현미도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날은 우는 날이었다.
사는 동안 내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날이었다.
가슴에 들어찬 슬픔이 다 토해지고 나면
햇볕에 바짝 말려서
새 마음, 새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왜 가슴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 채,
김약사는
다만
잃어버린 기억이 되돌아와
눈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 울고 나서야
어쩌면 보고 싶은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김약사의 텅 비어버린 기억을
잠시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