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은 35살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그럴듯한 몸매를 내세우며 SNS에서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김지영보다 더 젊고, 더 예쁘고, 능력까지 좋은 여자들이 매일매일 늘어나니
김지영은 자신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었다.
김지영에게 12월은 매년 찾아오는 저주받은 시간이었다.
젊음은 시들어 가고
나이를 강제로 한 살 더 먹게 하는
무시무시한 시간의 힘.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김지영은 암울하고 암담한 마음으로
골목 귀퉁이 안쪽을 막 들어서고 있었다.
춥고 스산한 날씨에 더해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의 어둠을 잔뜩 품고 있는 그곳을 들어서는
김지영의 눈에
쓰러져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옆으로 누운 그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염색 안 한 흰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해보이는 차림새에 수더분한 체구를 보아하니
그 사람은 중년이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는
소지품으로 보이는 가방이 놓여있었다.
김지영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선택지 앞에서
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쓰레기처럼 가볍게 버리는 사람이었다.
12월 어느 날 오후 김지영 앞에는
의식을 잃은 한 사람과
그 사람 것으로 보이는 가방이 놓여있었다.
김지영의 선택은
늘 그렇듯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보다 가방 쪽으로 향했다.
우선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어딘가에서 CCTV가 지켜보고 있는지 확인한 후
김지영은
가방을 마치 자기 것처럼 당연한 듯 들어 올려
손에 꽉 잡았다.
김지영은 빠르게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김지영 집인 원룸은 좁고 늘 어두웠다.
버는 대로 쓰고
버는 대로 놀면서 살았더니
35세 김지영에게 남은 것은 좁디좁은 반지하 원룸이었다.
그래도 고시원이 아닌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지만
고시원은 서로의 소음이라도 들을 수 있으니 덜 외롭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원룸의 문을 열자마자
김지영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침대는 오래 빨지 않아 옛날의 광채를 잃어버린
누런 침구들로 뒤덮여 있었다.
아직 끊기지 않은 보일러를 틀고
냄새나는 이불로 몸을 덮은 채
김지영은
들고 온 가방을 거꾸로 들어
힘 있게 털었다.
분명 가방은 싸구려처럼 보였는데
가방 안에서는
명품 지갑과 벤츠로고를 품은 차 키, 그리고 조제약, 화장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명품 지갑에서는
신분증, 각종 카드, 현금으로 대략 100만 원 정도가 5만 원권으로 들어있었다.
깜짝 놀랄만큼 많은 현금에
심지어 백화점상품권 몇장까지.
김지영은
쓰러져있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 사람을 구해와서 돈을 더 뜯어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가방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역시 김지영은 큰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집을 뛰쳐나와 왔던 길로 빠르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며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김지영은
그 사람의 신분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범상치않은 소지품을 통해 돈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김지영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우선 신분증에 나와있는 사진과 비슷해 보여야 하는데,
두사람의 나이차가 상당히 나는 상태였다.
게다가 염색을 하지 않아 반백에 가까운 머리로 사진에 찍혀있었다.
쯧...
오래되어보이는 핸드폰은 쉽게 열렸다.
ㄱ 모양으로 열리더니
혹시몰라 열어본 메모란에는
온갖 비밀번호들이 적혀있었다.
친절하게도 제목과 비번이 나란히 쓰여있었다.
이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쉬울까
잠시 생각도 해봤지만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된 김지영은
본인 또한 조심성없이
그 사람의 비번을 그대로 사용하고 말았다.
핸드폰의 녹음파일에서 건진
뒤죽박죽 녹음된 내용은
본인도 의도치않고 녹음된 내용이 뻔해보였다.
사진을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에 비해
그 사람의 목소리는 힘이 없는 중저음이었다.
간간히 대화 중 흥분한 고성이 녹음되어 있기도 했는데,
억눌러온 분노가 터져나오듯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였다.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고성이었고
목구멍의 피냄새가 맡아질만큼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김지영이 놀란 부분은 그 고성 사이사이에 들리는 흐느낌이었다.
그런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어떻게 눈물이 나는지
김지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참 복잡하고 이해할수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외모만 비슷해지면 되니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느꼈다.
그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김지영은 몰랐다.
김약사가 처했던 삶의 불행을.
절박한 짐승이나 내는 그런 비명소리는
불행이 불러온 결과를 감당해내는 소리였다.
이미 끔찍히도 불행을 싫어해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살아온 김지영에게 있어서
본인이 내본적도 없는
이해할수도 없는 소리였다.
그 내막이나 이유를 전혀 알고싶지 않았지만
그 사람 흉내를 내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비슷해야 하므로
핸드폰에 녹음된 내용을 반복해서 들으며
웃음소리부터 평소 목소리와 비명소리까지
부지런히 연습했다.
하이톤을 가진 김지영에게
중저음의 점잖은 목소리는 쉽지않았지만
그것이 가져다 줄 금전적 이득을 생각하니 힘든줄도 몰랐다.
김지영은 그 사람의 카드로 성형외과도 들락거렸다.
사진과 최대한 비슷하게 얼굴 윤곽을 만들고
크고 아름다운 눈도 잘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안경으로 가리고
살을 최대한 찌웠다.
살이 찌면 사람의 윤곽이 바뀌고 몸의 실루엣이 변하므로
그쪽이 훨씬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밥을 잘 안먹고 살았던 김지영은
그 사람의 카드로 부지런히 쇼핑하며
좋은 것, 귀한 것들을 먹으며 살을 찌웠다.
몇달 지나고 나니
김지영은
화장 안 한 상태인 그 사람의 사진과
상당히 비슷해졌다.
몇 달 후 김지영은 떨리는 가슴을 자신감으로 가장하여
조금더 살찐 그 사람의 모습으로
새 신분증을 만들기위해 관공서로 들어갔다.
그 사람의 신분증을 직원 앞에 당당히 들이밀며
새로 찍어온 사진으로
온갖 증명서를 떼어달라고 요구했다.
가족관계증명서, 은행에 제출하는 인감증명서, 심지어 여권까지 제일 긴 기간으로 신청했다.
말없이 사진과 김지영의 얼굴을
한꺼번에 훑어본 직원은
각종 증명서들을 떼어주며 푼돈을 요구했다.
김지영은 기꺼이 카드를 던져주었다.
팁을 요구하면 팁도 줄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은 미혼이었고
주소지는 찾아가보니 거대한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말그대로 부자동네였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됐지만
그 사람 아니 그 여자의 직업은 약사였다.
쓰러져 있었던 가방주인은
바로 그 김약사였다.
그렇게 김약사는
김지영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김약사로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