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눈꺼풀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빛깔이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 천장이었고
그곳에는 유일하게 불그스름한 빛을 내뿜는 전등이 하나 박혀있었다.
김약사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뇌가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서서히 질문이 생겨났다.
여기가 어딘지
왜 누워있는지
사방에서 나는 냄새의 정체는 무엇인지
머릿속에서는 계속 물음표가 떠다녔다.
서서히 뇌를 굴리듯 눈알을 굴리며 잠깐 누워있는 동안
어색한 침묵과 정체 모를 냄새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분명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을 증명하는 듯
조용한 움직임이 느껴졌으나
어디에서도 진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김약사는 주변에 있을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기운이 없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줄 알았다.
계속 입을 크게 벌리며
점점 더 크게 소리를 내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달싹거리며 온 힘으로 외쳐도
소리가 바깥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다 그만
김약사는 큰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몸매가 다 드러나는 스판 운동복을
위아래도 착용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껍고 찐한 화장과
글래머러스한 몸매 보다
더 튀어 보이는 것은 눈빛이었다.
레이저가 나오는 듯 날카로운 투명한 연갈색의 눈동자,
연갈색 동공과 겹쳐지는 흰자위 때문에 눈 전체가 눈동자로 보이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신비롭다 못해 두려운 느낌을 가지게 하는 눈.
이 세상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고양이로 변해
금방이라도 할퀼 것 같은
매끄러운 몸의 움직임과 옷차림 때문에
그녀는 말 그대로 고양이처럼 보였다.
바닥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어리둥절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김약사의 겨드랑이에 손을 짚어넣어
김약사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모든 동작이 빠르고 자연스러웠고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약사가 잠시 비틀거리자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름이 뭐야?"
크게 입을 벌려 소리 질러봤지만 정적뿐이었다.
"말을 못 해?"
김약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는
김약사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방을 나갔다.
김약사는
고양이 여인의 질문으로 인해 받은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김약사가
병원을 빠져나와
비척비척 겨우 걷다 쓰러져버린
골목 한 귀퉁이에는
엉킨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그 건물의
제일 꼭대기층에는
'고양이 마사지 샵'이 있었다.
고양이를 마사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가 마사지해 준다는 말인지
분분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간판이었지만,
고양이 여인을 만나고 나면
바로 이해가 되는 이름이었다.
엎어져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쓰러져있던 김약사도
쓰레기인 줄 알았는지
주변에는 쓰레기 천지였다.
고양이여인도
그것에다
쓰레기를 버리다가
쓰레기 사이에서 김약사를 발견했다.
얼마나 방치됐는지 알 길도 없고
그래서 처음에는 죽은 시체인줄 알았다.
고양이 여인은 처음에는 발로 흔들어 보았다.
그다음엔 몸을 낮추고 숨을 쉬는지 가까이에서 확인했다.
미세한 호흡을 들은 것 같아
둘러업고 3층 마사지 샵까지 올라갔다.
김약사는 고양이 여인의 눈에 띈 지
근 하루반나절만에 깨어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김약사에게
밥을 챙겨주고 잠자리를 봐주며 돌봐주는 동안
고양이 여인은
평생 외로웠던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고양이 여인은
김약사가
부디
기억을 되찾지 말기를
그리고 계속 말 못 하는 사람으로
자신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길
바랐다.
김약사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있다가
밥 주면 밥 먹고,
간식 주면 간식 먹고,
어디론가 데려가 씻겨주면 아이처럼 몸을 맡기곤 했다.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른 채
김약사는
손가락 사이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고양이 여인이 바빠 보여
조용히 그녀를 도왔다.
그 직후
고양이 여인이
마사지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며
열심을 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마사지를 배워
전업 마사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고양이 여인과
말 못 하는 여인의 조합이라니.
손님들은 신기해했고
신기함에 외모의 신비로움과
사람들의 상상력까지 더해져
마사지샵은
바야흐로
첫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사지를 받으면 천년을 살게 된다든지,
마사지를 받고 나면 아픈 곳이 다 낫는다든지,
고양이 샵에서 주는 차는
고양이 끓인 물인데
그걸 마시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게 된다든지,
허무맹랑하고 아무 의미 없지만
각자 꿈꾸고 바라는 것들을 가득 담은 헛소리들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추위가 물러가고
무더운 날을 지나
다시 한번 쨍하게 추운 날들이 찾아왔다.
거의 샵 안쪽에서만 머물던
김약사가
두려움을 이기고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외부로 나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래쪽에서
계단을 밟아
또각또각 걸어 올라오던
하이힐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동공은 동시에 커졌다.
거울로 보듯
똑 닮은 모습이었다.
올라오던 여자의 행동은 무척이나 빨랐다.
느리게 올라오던 걸음이 거짓이었다는 듯
잽싸게 돌아서서 뛰어내려 갔다.
그리곤 흔적 없이 사라졌다.
너무 놀라
멍하게 멈춰있던 김약사는
뒤늦게서야 그 여자를 찾아 내려 갔지만,
건물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그 여자는 온 적도 없다는 듯
흔적이 없었다.
말을 할 수도 없는 김약사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